지하경제 양성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응당 들어와야 할 세입이 줄줄 새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하경제 양성화가 목표하는 바는 세입증가다. 쉽게 말해 세금을 더 거두겠다는 것이다. 그럼 세금은 왜 더 거두야 할까. 복지부터 안전까지 갈수록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불과 20년 전만해도 국가가 온라인 불법다운로드를 신경쓸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10년 전만해도 대기업 골목상권 침해문제는 거론되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이 늘어날수록 필요로 하는 예산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국가가 마땅히 제 역할을 하려면 예산이 필요하고 그걸 충당하려면 적정한 세금을 거둘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새 대통령이 '증세는 없다'고 못을 박아버리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복지를 강화하겠다는 건 기본적으로 찬성이지만 그러려면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노릇이다. 당장은 지하경제 양성화, 비과세 감면으로 하더라도 중장기적으로는 증세는 필연적으로 가야할 수밖에 없다. 한국 국민들은 현재 기본적으로 세금을 너무 적게 내고 있기 때문이다.
증세는 없다면서 지하경제 양성화와 함께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게 바로 비과세감면이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개혁이 될지는 미지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정부 때 '비전2030'조차도 재원대책은 비과세감면 축소해서 마련한다고 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이명박정부도 처음엔 비과세감면 축소한다고 뻥카 쳤지만 되려 비과세감면 규모가 폭등해서 위법 논란까지 나왔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비과세감면 축소한다고 말은 하지만 "경제부흥"과 "경제위기 극복" "복지확대"를 이유로 비과세감면 늘리라는 요구가 높아질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사회시스템이란 쇼핑이 아니다. 이것저것 좋은 물건 골라잡아서 꾸민다고 되는게 아니다. 정책과 정책간 상충되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가령 고졸취업 확대가 실패할 운명일 수밖에 없는 것은 정규직조차 언제 짤릴지 몰라 불안해하는 작금의 세계 초일류 노동유연성 속에서 고졸 취업자들이 얼마나 버텨낼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다. 이런 상황에선 당장 나라도 내 자식을 고졸취업자로 만들고 싶지 않다. 거기다 이공대 나와도 비정규직으로 취업하는 마당에 고졸이 무슨 수로 노동지옥을 버텨낸단 말인가. 그건 의대와 공무원시험에 젊은이들이 몰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말인즉슨, 노동안정성 시스템을 적절히 갖추지 않으면 비정상정적인 대입경쟁을 막을 방법이 없고 더 비정상적인 의대경쟁과 공무원시험경쟁을 막을 방법도 없다. 적절한 노동안정성은 또 '기업국가' 시스템을 깨지 않으면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한다.
발화점
직업학교는 특정 기술을 가르친다. 특정 기술은 특정 산업에 특화되어 있다. 한국 같은 경우에는 특정 기업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정 산업, 기업에만 통하는 기술을 열심히 배우도록 독려할려면 그 기술을 배워서 평생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중간에 기술이 노화되면 재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하고, 그 기간 동안 소득이 보전되어야 한다.
그런 시스템이 안되어 있는, 한국, 미국 같은 사회에서는 직업학교를 통해 특정 기술을 배우기 보다는, 대학에 가서 보편 적용 가능한 일반 기술(즉, 인지 능력을 향상시키는 지식)을 배우는게 낫다. 그래야 해고되어도 어디서나 사용가능한 보편적 인지 기술로 재고용도 된다.
<강한 노동자권리--직업 교육--무료 등록금>이 한 셋트로 연결되어 있고,
<약한 노동자권리--대학 교육--비싼 등록금>이 한 셋트로 연결되어 있다.
사회체제는 패키지 상품이지,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옵션 상품이 아니다. 사회적 연대는 낡은 운동권 생각이 아니라, 다수가 편안한 사회를 만드는 가장 현실적 방법이다.
지하경제 양성화나 비과세감면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당장 지하경제 양성화는 탈세를 때려잡겠다는 정책의지인데 정작 장관 후보자라는 사람들은 죄다 크고작은 탈세 전력에 연루돼 있다. 이런 식이라면 지하경제 양성화라는 구호가 무색해진다. 비과세감면 축소를 하려면 대기업과 특정 집단에 대한 특혜를 없애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건데 이는 경제민주화와 정확히 맞닿아있다. 거기다 이들은 대체로 박근혜에게 표를 준 집단과 겹칠 수 있다.
물론 '선복지 후증세 논의'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비롯한 보편복지운동 주창자들이 여러차례 강조했던 사안이기도 하다. 간단히 얘기하면 우선 복지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고 복지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인뒤 국민적 합의를 거쳐 전면적인 증세로 가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당장 박근혜가 증세논의에 미온적이라고 해서 마냥 비판만 할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박근혜가 '증세는 없다'고 못을 박아 버리는데 있다. 이 경우 복지재원 마련도 제대로 안되면서 증세도 안될 수 있다. 마치 이명박 정부때 4대강 사업이 각종 정부예산을 빨아들이면 블랙홀 구실을 하며 재정운용에 심각한 난맥상을 초래했던 것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이 경우 복지강화라는 선의가 '복지혐오'라는 결과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발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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