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은 지난해 기준으로 당원 수가 남북한 전체인구보다도 많은 8060만명이나 되는 세계 최대 정당이자 국가와 사회를 직간접으로 통제하는 유일한 정당이다. 그런 중국공산당이 11월8일 제18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를 개최한다. 이 당대회에선 차기 공산당 중앙 지도부를 선출한다는 점에서 전세계의 관심이 쏠린다.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선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약 350여명, 정치국 위원(20명 가량)과 정치국 상무위원, 그리고 총서기를 선출한다.
10년간 중국 이끌 제5세대 지도자
이 모든 과정에서 전세계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단 한 명을 뽑으라면 단연코 국가부주석 시진핑(習近平)일 것이다. 그는 현 국가주석인 후진타오 뒤를 이어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국가주석,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예약해 놓고 있다. 1953년생으로 올해 59세인 시진핑은 1세대(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2세대(덩샤오핑), 3세대(장쩌민), 4세대(후진타오)에 이어 향후 10년간 중국을 이끌 5세대 지도부를 대표한다.
제5세대는 1949년 건국 즈음에 출생한 ‘공화국 세대’이자, 1966~1976년 문화대혁명 때문에 청소년기에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은 ‘잃어버린 세대’이다. 시진핑 역시 순탄치 않은 청소년 시기를 보냈다. 고위급 인사들 집단거주지인 중난하이에 살며 8·1초등학교(인민해방군 창설일인 8월1일을 기념해 창설한 간부자녀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유복했다고 할 수 있지만 1962년 펑더화이(彭德懷) 원수가 실각하면서 그의 측근이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도 국무원 부총리에서 산시(陝西)성으로 좌천당하며 고난이 시작됐다.
시진핑은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69년 ‘지식청년’으로 분류돼 산시성 옌안(延安)시 량자허(梁家河)촌으로 하방을 가서 7년 가량 지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79년 칭화대 공정화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중국농촌의 시장화를 위한 법제 건설 연구’라는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겅바오(耿飈) 국방부장의 비서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한 그는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 등 푸젠성에서만 17년 반을 근무하며 정치 경력을 착실히 쌓았다.
사통팔당 인맥과 신중한 처세
시진핑은 이른바 태자당이다. 태자당이란 혁명 원로 자제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만큼 시진핑을 거론할 때 그의 아버지 시중쉰(1913~2002)의 그림자는 매우 크다. 특히 1999년 건국 50주년 국경절 행사 당시 에피소드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라고 할 수 있다. 당시 86세로 노인성 치매를 앓던 시중쉰은 천안문 성루에 올라 행사를 참관하길 간절히 바랬다고 한다. 모두들 선전(深圳)에서 베이징까지 가야하는 긴 여행이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시중쉰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당중앙은 특별기와 전담요원을 선전으로 보내 시중쉰을 모셔왔다. 시중쉰은 당시 국가주석이던 장쩌민(江澤民)과 부주석 후진타오(胡錦濤) 등을 직접 만나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후진타오가 시중쉰에게 문안인사를 왔을 때는 “젊고 능력있으며, 일을 매우 잘하고, 인민들 사이에서 평이 좋다. … 우리 당, 국가와 인민의 희망이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후진타오가 엄청나게 감격한 것은 당연지사. 물론 이 모든 자리에서 시진핑은 아버지 곁을 지켰다. “시중쉰이 시진핑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라고 할 만 했다.
시진핑은 사통팔달 인맥을 자랑한다. 그 인맥이 시진핑이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르는 데 큰 구실을 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인맥으로 쩡칭훙(曾慶紅·73)을 거론할 수 있다. 두 사람 아버지는 절친한 혁명동지 사이였다. 같은 초등학교를 나오는 등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냈다. 쩡칭훙이 시진핑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장쩌민의 핵심 참모인 상하이방(上海幇)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쩡칭훙을 통해 시진핑은 상하이방과 관계를 맺게 된다. 특히 2007년 10월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자신이 은퇴하는 조건으로 시진핑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천거해 시진핑이 차기 국가지도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시진핑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50)도 시진핑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인맥이다. 시진핑을 처음 만날 당시 이미 한국으로 치면 이미자에 버금가는 국민가수였던 펑리위안은 지금도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 가무단 소속 현역장성(소장)이다. 시진핑이 중국공산당 지도부 일원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펑리위안 남편’으로 불릴 정도였다. 펑리위안은 중국인민해방군에 상당한 인맥이 있어 시진핑에게 큰 힘이 됐다. 펑리위안은 5월 14일 인민해방군 산하 예술학원 원장(대학 총장)에 내정됐다.
두 사람은 시진핑이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으로 일하던 1986년 처음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슬하에 1992년생인 외동딸 시밍쩌(習明澤·19)가 있다. 두 사람은 첫만남부터 서로 끌렸다고 하지만 결혼은 처음부터 순탄치는 않았다. 양가 부모가 모두 결혼을 반대했다. 최고위급 간부인 시진핑 집안에서 볼 때 펑리위안은 산둥성 하급간부 딸에 불과했다. 반면 펑리위안 집안에서 보기에 시진핑같은 태자당은 방탕하고 돈을 아낄 줄 모른다는 인식이 강했다. 두 사람은 결국 부모 몰래 결혼식을 올렸다.
시진핑은 첫 결혼에 실패한 뒤 펑리위안과 재혼했다. 첫 부인은 시중쉰의 부하로 활약했고 건국 이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커화(柯華)의 딸 커링링(柯玲玲)이었다. 양가 부친이 각별하다보니 자연스레 이어졌다. 시진핑이 27세였던 1980년 무렵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몇 년 못 가 헤어졌다. 자녀는 없었다. 외국생활에 익숙했던 커링링이 당시 지방간부에 불과했던 시진핑과의 따분한 신혼생활에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시진핑과 펑리위안 얘기는 여기를 참고했다.).
물론 시진핑이 인맥만으로 지금같은 자리에 오른 건 결코 아니다. 시진핑의 품성과 자세가 매우 큰 구실을 했다. 어릴 때부터 시중쉰이 가르친 후도관용(厚道寬容; 후덕한 자세로 관용을 베풀라)을 실천하며 겸손함과 청렴성을 키웠다고 한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속에서 그는 후덕한 인상과 원만한 대인관계, 서글서글한 성격 덕에 공청단과 상하이방에서 두루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쩡칭훙이 후진타오에게 시진핑을 천거하면서 “각 정파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성품이 있기에 가능했다(시진핑과 보시라이).
이 때문에 한때 시진핑과 함께 차기 지도부 후보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지위를 박탈당한 채 당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한 보시라이와 시진핑을 비교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태자당, 상하이방, 공청단… 세 파벌의 합종연횡
시진핑이 차기 국가지도자가 된 것은 단순히 아버지 잘 만나고 능력있는 젊은이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중국 정치를 이끌어가는 것은 중국공산당이고 당내 파벌간 관계에 따라 정치 판세가 달라진다. 현재 중국공산당을 이끄는 세 파벌은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태자당, 상하이방이다. 공청단 파벌은 현 국가주석과 총리인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상하이방은 장쩌민을 정점으로 한다. 태자당은 혁명 원로들의 친인척 및 관련 인사들로 이뤄져 있다.
주장환(한신대 중국지역학과 교수)은 “현재 중국 정계의 상층부(노년층)에서는 범태자당 계열이 우세하고, 중하층 수준(장년층)에서는 공청단 파벌이 많아서 양 파벌의 세력이 백중세”이지만 “제5세대 지도자 가운데 절반 정도는 공청단에 속한다.”면서 이렇게 분석했다. “차기 최고 지도자로서 시진핑이 낙점된 것은 현재 약간 우세를 점하고 있는 범태자당 계열의 강력한 지원과, 아직까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공청단 파벌의 묵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중국공산당 내 각 파벌간 권력투쟁에 대해서는 여길 참고했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향후 정치국 상무위원은 9명에서 7명으로 줄어들 것이라 한다. 세력별로 보면 태자당은 시진핑ㆍ왕치산, 상하이방은 장가오리ㆍ장더장으로 각각 2명씩을 진출시키고, 공청단은 리커창ㆍ리위안차오ㆍ류윈산 등 3명을 상무위원단에 진입시키는 시나리오가 유력하다. 이런 방안을 결정한 지난 8월 초 베이다이허 회의에서는 파벌간 고성이 오가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명단. (출처: 위키피디아)
중국을 이끄는 이들은 결국 모두 태자당?
태자당은 아무래도 이름 자체가 아무래도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기도 힘들고 출생을 기준으로 하다보니 공청단처럼 세력을 확장하는데도 한계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태자당 출신이 차기 최고지도자가 되는 것은 시진핑의 역량과 권력을 둘러싼 세력간 경쟁도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중국공산당의 성격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바로 고위급 간부나 경제계 주요인사 등이 하나의 기득권층이 됐으며 이들의 자제들이 또다른 ‘태자당’이 돼 정계와 재계 요직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르몽드 디플로마트크 한국판 48호 보도는 이렇게 전한다.
‘신화통신’의 전 국내부장이던 경제학자 양지성은 "개방과 더불어 1990년대 중반까지 하급 계급에 속했던 사람은 원할 경우 신분 상승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 그에 따르면 오늘날 중국에서는 더 이상 사회이동이 이뤄지지 않는다. 요직은 늘 교육수준이 높은 간부의 자제들에게 배정돼 있다. 개혁 이후 세대들에 대해서는 사회계층의 세습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공직이나 당 간부의 자제가 그대로 간부가 되는 것이다. 부유한 집의 자제는 계속 부유하게 살아가고, 가난한 집 자식들은 여전히 가난하게 살아간다.”
태자당이 처음부터 부정적인 의미였던 건 아니다. 권태선이 쓴 한겨레 칼럼에 따르면 공산당 정권 수립 뒤만 해도 혁명 유공자 자녀들이 특권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당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극한 상황을 겪으면서 태자당 다수가 경제계를 장악하면서 부정적인 의미가 커지기 시작했다. 태자당은 먼저 국영기업을 장악한 뒤 연고를 십분 활용해 경제성장의 과실을 차지했다. 중국 사회과학원 조사 결과 백만장자 91%가 당 간부 자제라고 할 정도다. 거기다 이제는 최고 정치지도자 자리까지 배출하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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