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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자작나무책꽂이

엉터리 번역이 망쳐놓은 추천도서① <퀀트>

by betulo 2011.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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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다. 사전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뭔가 끌리듯이' 책을 집어들었는데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횡재했다는 기분에 뿌듯함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최근 읽은 책 <퀀트: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한 수학천재들 이야기>(스캇 패터슨, 구본혁 옮김, 2011, 다산북스)가 딱 그런 경우다. 하지만 자주 느끼는 문제점을 이 책에서 또다시 발견한건 마음이 아프다. 바로 불성실한 번역 때문이다. 

영어 실력이 떨어져서 번역이 잘 안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번역을 할 정도 영어실력이라면 기본적인 실력은 된다고 보는게 맞을테니까. 오히려 국어실력이 떨어지는 경우와 번역을 성실하게 하지 않은 경우가 더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국어공부보다 영어공부만 중시하는 분위기를 극도로 혐오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퀀트'란 해박한 수학지식을 이용해 각종 파생금융상품을 개발하는 등 금융시장을 주도하는 천재 수학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금융세계화의 첨병이자 엄청난 수익률을 올리며 일확천금을 손에 넣은 이들이기도 하다.

출판사 보도자료는 월스트리트저널 전문기자가 쓴 이 책이 "
퀀트들이 어떻게 그들의 놀라운 투자기법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금융 재앙의 씨앗이 되어 가는지, 또 대공황 이래 최대의 경제쇼크라 할 만한 2008년 금융시장의 붕괴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 과정을 매우 상세하고도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고 밝혔다.  

이 책의 공식 번역자는 
구본혁(울산대 경영대학 교수)이다. 한국장기신용은행(현 국민은행)에서 25년간 근무한 경력이 있고 현재 바른번역 회원으로 활동 중이라는 구본혁은 불성실한 번역이 어떤 것인지 내게 생생한 사례를 보여주었다.  

1. 언론왕립사회회보?

469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2000년에 발간된 영국과학아카데미 공식저널인 언론왕립사회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에 게재된 <재무에 있어서의 수학의 사용, 오용 및 남용>이라는 논문에서, 그는 "세계가 수학자들이 주도하는 시장붕괴를 피하려면, 전면적인 재사고(再思考)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언론왕립사회회보...이게 도대체 뭘까... 먼저 '사회'는 Society 뜻을 완전히 잘못 번역한 것이다. The Royal Society는 영국왕립협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번역자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열혈팬이라서 오역 오마쥬라도 한 것일까...)

'언론'이란 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건지도 의문이다. 내가 번역자라면 '영국왕립협회 철학회보' 정도로 옮기겠다. 
 
2. 벨커브와 정규분포곡선
 

일반적으로 어떤 용어가 처음 등장하고 '앞으로 이런 용어로 쓰겠다'는게 나오면 그 다음부턴 특정 용어를 계속 사용한다. 용어 선택이 중요한 것은 정확한 번역이 중요하다는 것과 동의어나 다름없을 정도라고 본다.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도록 하는것도 중요하고 학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를 쓰는 것도 중요하다. 첫 부분에서 용어설명이 나오면 그 다음부터는 굳이 용어설명을 또 할 필요도 없다.하지만 '퀀트'는 이런 상식을 무시하는 사례가 연달아 나온다. 

이 책 제3장 '시장을 이기
는 전략'을 보자. 
59쪽에는 이렇게 돼 있다. "시각적으로 나타내면, 랜덤워크의 다양한 결과를 나타낸 도표는 둥근 모습을 하고 정상을 향해 부드럽게 상승하다가 같은 비율로 하락하는 벨커브(bell curve), 바로 정규분포곡선이다."  72쪽에서 "브라운 운동을 옵션의 변동성에 대한 가격을 결정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거래자들이 주식이 가장 흔히 나타낼 수 있는 가격대, 즉 벨커브의 중앙부분에 위치한다고 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돼 있는 점, 그리고 제4장 '변동성이 미소를 지을때'에서 102쪽에 "도표에 표시가 되면, 이 극심하고 예측되지 않는 움직임들은 전혀 벨커브처럼 보이지 않는다."로 돼 있는 것까진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제5장 '퀀트 4인방의 등장'인 164쪽엔 "그래프에 그것을 점으로 표시하면, 그 변동성은 벨커브(정규분포곡선)처럼 보였다."란 표현이 등장한다. (이어 168쪽[각주:1]과 169쪽[각주:2]에선 벨커브란 용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나는 의문이 생겼다. 혹시 이 책은 공식 번역자와 별도로 '하청'으로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건 아닐까. 벨커브라는 용어를 쓰다가 어느 순간 벨커브(정규분포곡선)이라고 쓰는건 3장 번역과 5장 번역의 주체가 달라서 그런 건 아닐까?

이런 의문은 제11장 '종말의 날을 가리키는 시계'에서 더 커졌다. 405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정규분포곡선인 벨커브가 인간들의 신장과 체중을 측정하는데 가장 완벽하다." 이어 476쪽에선 "벨커브(정규분포곡선)의 양쪽 날개부분의 바깥에 악몽처럼 퀀트들을 괴롭혔던 시장의 어두운 부분, 즉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 잠재의식 속으로 사라져버렸던 부분이 숨어 있었다."라고 돼 있다. 앞뒤가 뭔가 맞질 않는다.  

여기까지는 그냥 의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례를 더 찾으면서 의문은 의혹으로 커졌다. 

3. 신용부도스왑

제5장 '퀀트 4인방의 등장' 159쪽에는 신용부도스왑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결국 그것들은 보다 일반적으로 불리던 신용부도스왑(credit default swap, 신용위험스왑)이 되었다." 그 뒤 160쪽[각주:3]과 161쪽[각주:4]에는 모두 신용위험스왑이란 상당히 생뚱맞은 용어를 사용한다. 일반적인 표현은 신용부도스왑인데 말이다. 그러던 것이 171쪽에선 돌연 "2000년 말까지는 거의 1조 달러 상당의 신용부도스왑이 창출되었다."로 용어가 달라진다. 

제7장 '머니 그리드에서 한 판' 231쪽에서도 "계속해서 상하로 변동되는 이자율이 적용되는 채권들처럼 움직이는 신용부도스왑은 변동금리부채권과 큰 차이가 없었다."로 돼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혹시  번역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명이었던 건 아닐까? 공식 번역자 말고 '알바생'이 있었던 건 아닐까?

  
4. 숏커버링

제10장 '2008년 8월 효과' 347쪽에는 숏커버링(short covering)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용어설명이 들어있다. "(주가가 떨어질 것을 예측해서 주식을 빌려서 파는 공매도를 했지만, 반등이 예상되자 빌린 주식을 되갚으면서 주가가 오르는 현상-옮긴 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30쪽 뒤에서 같은 용어에 대해 다시 용어설명이 나오는건 무슨 경우일까. 

"퀀트들에 의한 숏커버링(short covering: 매도한 주식을 다시 사는 환매수를 말하며, 실제 주가하락으로 차익을 챙기는 경우와 주가상승 시 손실을 줄이기 위한 경우의 두 가지가 있음-옮긴 이)이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두 개를 비교해보자면 377쪽 용어설명이 훨씬 이해하기가 쉽다는 걸 알 수 있다. 혹시 번역자는 347쪽에 용어설명을 쓰고 나서 부족함을 느껴 377쪽에 다시 용어설명을 추가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두 부분을 맡았던 번역자가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일반적인 번역 메커니즘에 대해 내가 아는 지식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 만큼 별다른 선입견은 없다. 여러 사람이 같이 하건 혼자서 하건 하청을 주건 그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공식'적인 번역자라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오는 번역서에 대해 최종 교열 정도는 해야 예의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출판사 역시 책 나오기 전에 번역 일관성 정도라도 점검해야 하는거 아닌가?

<뱀다리(蛇足)>

책 읽으면서 이런 것까지 일일이 찾아서 기록한 다음 굳이 블로그에 하나하나 꼬집는걸 보면 저도 <오덕후>로 공인받을만한 소질이 농후하지 않을까 싶다. 오덕후 혹은 오덕군자란 무엇인가... 아래 글을 참고하시라. 

 


 

 
네이버웹툰 <호랭총각> 2부에 등장하는 명장면 되시겠다. 이만큼이나 오덕군자를 잘 정의한 게 어디 있을까 싶어 염치 없이 캡쳐해 올린다. 저자께선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출처: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22897&no=31&weekday=sun  
발화점: 현실창조공간(
http://www.realfactory.net) 구체적인 페이지를 검색하려 여러차례 시도했으나 검색이 안되서 그냥 여기까지만 ㅎㅎㅎ 



 


  1. "어떤 기업이 매수자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시장에서 매도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리면, 가격들이 벨커브의 최극단을 넘어서는 점까지 폭락하게 된다." [본문으로]
  2. "벨커브 상의 두터운 꼬리를 무시해 버렸다." [본문으로]
  3. 곧 신용위험스왑 시장이 해당채권 만기까지 그것을 매수해서 보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파산에 대한 인식이었다. [본문으로]
  4. 신용위험스왑 거래는 사실상 아무런 규제당국의 감시도 없고 투명성도 보장되지 않는 월가의 그늘에서 이루어져 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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