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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생각

그리스, 몰락과 회생 사이

by betulo 2011.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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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11일 그리스에선 새 총리가 취임했다. 그는 “그리스가 유로존에 잔류하는 것은 통화안정을 위한 보장장치라는 점을 확신한다.”는 말을 취임 일성으로 내놓았다. 루카스 파파데모스(64) 총리가 거국내각을 이끌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10월 26일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결정한 2차 구제금융안에 대한 협상을 마친 뒤 이를 국회에서 비준시키고 이행하는 일이다. 게다가 12월15일까지 1차 구제금융 가운데 아직 받지 못한 6회분(80억유로)도 확보해야 한다.
 

 그리스 ‘위기’가 외신 뉴스를 장식하기 시작한 건 2009년 말부터였다. 급기야 지난해 5월 유럽연합한테서 구제금융을 받은데 이어 주기적으로 위기에 시달렸다. 국내에선 가혹한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시위와 파업이 줄을 이었다. 급기야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는 2차 구제금융안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자신에 대한 신임투표를 의회에서 실시하자는 폭탄선언까지 했고 결국 의회 신임투표 통과 뒤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서구 민주주의의 요람이었던 그리스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OECD 2위 장시간 노동과 연금소득대체율 95.1% 역설

 그리스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기의 원인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내 언론에서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원인 담론은 ‘복지포퓰리즘’이 그리스 위기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한다. 하지만 이는 한마디로 ‘희생자 비난하기’에 다름 아니다. 가령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다면 “저 여자 행실이 평소 문제가 있었다”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식이다.

그리스 역시 ‘위기의 진원지’로서, 그리고 위기를 확산시키는 주제에 데모나 일삼는다는 비난을 자주 받는다. 이에 대해 최근 한국을 방문한 프랑수아 퀴세 프랑스 낭테르 대학교 교수는 필자와 인터뷰에서 ‘남유럽은 원래 부패가 심하고 거짓말을 잘하고 과시욕도 강하고 게으르다’는 문화적 선입견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과연 그리스는 과도한 복지 때문에 이 지경이 됐을까? 2008년 기준 1인당 연평균 노동시간을 보자. 그리스 노동자들은 평균 2120시간으로 OECD에서 한국(2256시간) 다음으로 장시간 노동한다. OECD 평균은 연간 1764시간이고 근면하기로 소문난 독일은 1430시간이다.

사회보장지출 규모도 알려진 것과는 차이가 많다. 2007년 기준 OECD 평균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지출은 19.3%였는데 그리스는 21.3%로 OECD 평균과 2%p 차이다. 가장 높은 비중은 프랑스로 28.4%, 일본은 18.7%, 미국은 16.2%, 한국은 7.5%다. 2004년 현재 OECD 국가의 국민의료비 중 본인부담률 평균은 20.5%이지만 그리스는 45.2%로 36.9%인 한국보다도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복지포퓰리즘이란 말이 민망한 수준이다.

 물론 그리스는 소문난 복지후진국이고 이것이 그리스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바로 왜곡 자원배분 때문이다. 남성 가장이 일자리나 연금을 통해 가족경제를 책임지는 가부장제 전통에 기반한 복지제도 때문에 노인연금 비중은 지나치게 높고 사회서비스는 지나치게 빈약하다. 그리스는 고령화 관련 지출 비중이 사회보장 총지출 가운데 42.0%나 되고 연금의 소득대체율은 95.1%로 유럽 최고 수준이다. 이런 시스템은 높은 연금 비중, 과다한 공공부문 일자리, 낮은 여성 취업률 등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실업극복이나 여성 등 사회적약자 문제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진짜 원인은

 복지포퓰리즘이 그리스 위기와 별 상관이 없다면 핵심 원인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리스 문제는 단순히 한 나라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유로화 가입 이후 물가수준이 높고 자국 산업 경쟁력이 낮은 그리스는 실질실효환율이 고평가되어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적으로 누적되었다. 2009년 기준 제조업 비중이 10.3%로 OECD 최저 수준인 반면 서비스업 비중은 75.9%로 최상위권인 것에서 보듯 산업구조 자체도 경기변동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유로화 가입 이후 실질금리가 낮아지면서 이자부담이 줄어들자 해외자본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이는 대외부채를 급격히 높였다.

 GDP 대비 무려 25.8%나 되는 지하경제는 탈세를 부추겨 재정적자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재원배분을 왜곡하고 형평성을 악화시키며 시장질서와 정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상황이 이런데도 2004~2009년 집권했던 신민당 정부는 부자감세 정책을 펴며 정부 곳간을 스스로 텅텅 비게 만들어 버렸다. 2004년 35%였던 법인세율은 해마다 3~4%p씩 대폭 인하해 2007년에는 25%까지 떨어졌다. 거기다 소득세율 인하와 친척 간 부동산상속세 폐지 등으로 그리스 재정수입의 GDP 대비 비율은 2007년 이후 감소세를 보이는 반면 재정지출은 2006~2009년 동안 9%p 증가했다.
 

 이런 구조적 모순에 미국발 금융위기가 더해지면서 그리스는 급격히 나락으로 빠져들게 된다. 지난해 말 기준 GDP 대비 그리스 외채비율은 141.3%나 된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 이원화돼 있는 유로존 체제의 구조적 모순이다. 거시경제 안정을 위해서는 유로존 차원에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적절하게 조합할 필요가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여기에 헤지펀드 등 국제투기자본이 2010년 초 그리스 국채에 대해 매도포지션 비중을 높인 뒤 4~5월에 그리스 국채를 대량 매도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긴 것도 그리스를 구제금융으로 내모는 단초로 작용했다.

 ●회생인가 부도인가 갈림길 선 그리스

 2009년 말 이후 위기 국면이 지속되고 있는 속에서도 그리스는 제대로 된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부유층의 도덕적 해이도 심각하다. 그리스 재무부가 지난 9월 발표한 성명에 따르면 세금 체납액이 GDP의 18%나 되는 411억유로나 된다.

재정지출을 줄이려면 결국 과도한 노인연금과 공무원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지만 남성 가장이 일자리나 연금을 통해 가족경제를 책임지는 그리스 경제 특성상 정부 정책은 격렬한 반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거기다 ‘그리스 민중이 아니라 그리스에 투자한 자국 은행들을 구제하기 위한’ 유럽연합 구제금융 방식도 그리스인들에게 신뢰를 받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최대 야당인 신민당의 태도 역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신민당 안토니오 사마라스 당대표는 거국내각에 참여하기로 합의해 놓고도 14일 의원총회에서는 “우리는 과도 정부를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모든 것을 약속하지는 않는다”며 거국내각이 제출할 긴축예산안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신민당 주장은 결국 내년 2월19일에 조기총선을 해서 정권을 탈환하겠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정작 특별한 대안이 있느냐 하면 전혀 그것도 아니다.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은 지난 1일 “그리스 야당은 위기 시작 1년 반이 넘도록 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사사건건 발목만 잡고 있다.”고 꼬집었다.

 위기가 계속되면서 그리스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에서 탈퇴해 이전 화폐인 드라크마로 회귀할 것이란 주장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 문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전망이 엇갈린다.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디폴트를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 국채를 적잖이 보유하고 있는 여타 유로존 국가에게도 치명적이다. 결국 그리스의 미래는 유로존의 미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이 때문에 그동안 유럽연합은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지난해 5월과 올해 7월 두 차례 구제금융 지원을 결정한 게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온 대부분 방안들은 유럽연합 차원의 통일된 대응책이 아니라 독일·프랑스 등 주요 채권국을 중심으로 한 단편적인 대책이 주를 이루면서 근본적인 처방이 나오지 못했다. 각국의 정치적 입장 차이 때문에 합의에 이르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고 그 동안에 위기는 커지기만 했다. 그나마 합의에 성공하더라도 회원국마다 의회 표결을 통하고 한 나라라도 부결되면 채택 자체가 안되는 유럽연합 의사결정구조의 병목현상 또한 신속한 대책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지난 10월27일, 10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 끝에 획기적인 그리스 지원안을 마련한 것은 높아지는 위기감 속에 유럽연합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유로존이 구성될 당시 유럽중앙은행을 중심으로 통화정책은 단일화했지만 재정정책은 개별 국가별로 실시되고 재정규율은 지켜지지 않음으로써 재정위기의 씨앗이 싹텄다. 결국 해법은 유로존 국가간 재정통합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가령 트리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제안한 것처럼 유로존 공동재무부를 설립해 회원국의 유로본드 발행 등 재정정책을 관장하고, 유럽중앙은행과 연계해 거시경제정책을 구사하며, 각국의 금융 부문을 감독하는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물론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심스(Sims)와 사전트(Sargent) 교수는 현재 유럽 재정위기가 미국 건국 직후 상황과 유사하다고 평가한다. 당시 전쟁부채로 인한 재정위기를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 재무장관은 연방정부가 주정부 부채를 떠안고 연방이 징수하는 관세를 통해 부채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당시에도 엄청난 반발이 있었다. 나중에 제3대 미국 대통령이 되는 제퍼슨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협상을 통해 대타협을 이뤄냈다. 그 결과 신생 국가 미합중국은 붕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 위기 극복을 위한 종합대책을 제시했음에도 구체적인 조건과 실행 방안은 확정되지 않았다. 유로존의 존속과 세계경제 안정을 위해서는 유럽통합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좀 더 과감한 각오가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그 길만이 그리스가 사는 길이라고 본다.

외부 기고문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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