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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동양' 담론에 딴지걸기

雜說

by betulo 2011. 10. 8.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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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에서 '동과 서'라는 걸 방영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봤는데 다만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는 담론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다. 마침 대학원 수업 도중 '동과 서'를 보고 토론을 해야 해서 겸사겸사 동양 담론에 대한 짤막한 에세이를 썼다. (당초 교수가 제시한 토론문 방향은 그게 아니었다.)

http://home.ebs.co.kr/docuprime/view/view2.jsp

 

 대학에 갓 입학한 내게 한 선배는 교내 중앙도서관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처음 지을 때만 해도 동양 최대규모였다.” 당시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 말을 듣는다면 이렇게 되물어보겠다. “동양이 어딘데요?”

 
 우리가 대화를 나눌때 사용하는 낱말을 보면 명확한 정의를 하지 않는게 적지 않다. 명확한 정의를 요구하는게 오히려 무례해 보일 때도 있다. 가령 누군가 박원순 변호사는 시민운동을 했던 사람이다.”라고 하는데 정색을 하며 시민운동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때부터 대화는 십중팔구 옆길로 새거나 어색한 헛웃음 속에 침묵에 자리를 내주기 십상이다.

 
 결국 우리가 언어생활에서 사용하는 주요 개념들은 큰 틀에서 상호간 공유할 수 있는 개념들의 덩어리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시민운동 역시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범주 내에서 의미전달이 이뤄진다. 한국에서 북한에 대한 태도가 진보보수라는 범주를 나누는 기준처럼 쓰이는 것도 일견 희한한 상황이긴 하지만 위에서 말한 맥락에서 보면 이해할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근원을 따지는 노력은 깊이 있는 사유를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종북이라는 말이 아무리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특정한 의미 덩어리라 할지라도 그 말을 의식적으로 강조하는 것과 의도적으로 쓰지 않는 것은 매우 상반된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혹은 이미 존재했던 것인양 종북이란 말을 쓰는 것은 화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정치적 파장을 일으킨다. 화자가 나는 비정치적인 사람이고, 종북이란 말도 아무런 정치적 의미가 없다.”라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그 말 역시 정치적이다. 종북이란 담론 그 자체가 매우 예민한 정치적 의도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강국진·김성해(2011: 217)에 따르면 담론은 서사, 이야기, 대화, 신화, 이데올로기, 이론, 모형 등 다양한 단어와 호환되어 사용할 수 있다. 가령 여성담론이라고 하면 여성이라는 젠더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대화, 이야기, 주장, 논리, 설명 등을 모두 포괄한다

 
담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담론은 진실효과를 갖는 의미덩어리로서 정의할 수 있으며 특정한 인식과 가치관을 기초로 현실을 인식하도록 하고 더 나아가 현실을 재구성하는 효과를 갖는다. 경제적 토대가 지배적 담론을 반드시 결정하지도 못한다. 담론은 유동적이고 다양한 참여자들의 경쟁을 통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이런 맥락에서 동과 서의 차이점에 대한 동영상을 다시 살펴보면, 그 차이점을 따지기에 앞서 동과 서라는 담론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질문부터 시작하는게 적절할 것이다. 동양은 어디부터 어디를 가리키는가. 서양은 어디부터 어디를 가리키는가. 동양과 서양이라는 구분법은 동아시아에서 사용한 역사적 맥락과 유럽에서 사용한 역사적 맥락이 다르다.

 
 정수일이 쓴 책에 따르면 코빌라이칸이 세운 대원(大元) 당시 동양과 서양은 말라카해협을 기점으로 한 이쪽 바다저쪽 바다를 뜻했다. 이후 지리 지식이 늘어나면서 동양은 계속 서쪽으로 넓어졌다. 동양 담론은 일본이 제국주의 확장을 시도하던 20세기 초반에는 '서양에 대항하는 우리'라는 맥락으로 쓰이기도 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한 구별짓기인 셈이다
. 단재 신채호가 1909년 대한매일신보 논설을 통해 '동양주의'를 격렬히 비판한 것은 그것이 일본을 중심으로 한 패권적 야욕을 품고 있는 정치담론이란 점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상교통에서 말라카 해협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다.

 

유럽에서 동양(=오리엔트)이란 말 그대로 소아시아를 비롯한 중동지역을 의미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대상으로 삼은 동양이란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양(=동아시아)이 아니라 중동을 가리킨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팔레스타인 지역은 명백히 동양이다. 한국에서 성서의 땅은 서양으로 인식되는 것과는 충돌이 발생한다.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동양과 서양이란 대체로 동북아시아에 자리한 한··3국과 유럽+북미를 지칭한다. 하지만 이런 지리적 구분은 그 자체로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다. 당장 멀쩡히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우리가 흔히 북한이라고 부르는 곳이 사라져 버린다

 
타이완은 동양에 포함시켜야 할까 말아야 할까? 우리는 흔히 러시아를 서양에 포함시키지만 러시아 연해주는 북한·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고 그리 멀지 않은 바다 건너 일본과 만난다. 만약 동서양이 지리적 범주가 아니라 역사적인 연원과 연관된다고 한다면, 중부유럽에 위치한 헝가리는 그 근원이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EBS ‘다큐 프라임이 보여주는 동서양의 차이라고 하는 것도 사례는 대부분 한중일 대 북미·유럽에 그친다. 당장 중동은 동양인가 아닌가, 남미는 서양인가 아닌가. 동서양이라는 담론은 무척이나 허점이 많다. 차라리 EBS가 동북아시아와 미국·유럽 식으로 구별했다면 이런 지루한 비판을 받진 않았겠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서양에 속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북한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한국 사람과 상당히 다르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건 북한이 동양에서 벗어났다는 뜻일까 아닐까.

 
 다큐 프라임에서 말하는 차이가 현실에서 존재한다는 점은 부인하긴 힘들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차이점이 고정불변이 아니라는 점은 같은 민족임에도 극과 극의 역사발전단계를 거치고 있는 남북한만 봐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동서양의 차이라는 것에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적어도 도시화와 산업화, 서구식 근대화 등 요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해 사회경제적 제도에 따른 행태변화가 더 적절한 설명이 아닐까 싶다.

 
 스위스 산골에서 소를 키우는 소농이라면 프랑스 파리보단 강원도 산골의 농부와 더 비슷한 행동양상을 보일 것이란 가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가령 19세기 미국에서 활동한 경제학자로 '유한계급론'의 저자이자 제도경제학의 선구자로 유명한 소스타인 베블런은 대학 졸업 뒤 10년 가까이 백수 노릇을 하며 농사짓는 식구들 밥만 축냈는데 그건 가족 공동체 개념이 투철한 노르웨이 이민자 가정이었에 가능했다. 이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서양보단 동양에 더 가까운 모습 아닐까?

 
 이러저러한 딴지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의 일반적인 행태상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실험이나 행동 관찰을 통해서도 입증이 된다. 하지만 이를 동서양의 차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이 EBS의 패착이었다. 아울러 그 원인을 다분히 결정론적으로 본 건 아닌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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