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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4

조세문제,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 그림자를 못 벗어났다 증세와 감세, 조세 저항 등 온갖 세금 문제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60~70년대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박정희 정부가 1960년대 추진했던 ‘복지 없는 증세’, 1970년대 본격 시작했던 ‘복지 없는 감세’는 그 뒤 수십년간 한국 정부 조세정책을 규정했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본격적인 경제개발에 착수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6년 국세청을 설립하는 등 조세수입 확대에 매진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세수 증대는 모든 국가공무원의 기본과제이며 모든 공무원은 세무공무원(1966년 3월 30일 전국지방장관회의)이라고 강조했다. “납세야말로 국민된 자의 제1차적 책임이며 영예인 동시에 긍지”(1966년 8월 5일 전국세무공무원대회)라고도 했다. 하지만 급격한 세금 부담은 .. 2020. 4. 24.
김영삼이 남긴 나비효과, '재정건전성'이라는 괴물 재정건전성 때문에 가장 큰 정치적 공격과 비난을 받았던 건 노무현 정부가 아니었나 싶다. 특히 임기 후반기에는 언론과 야당, 학계까지 ‘방만한 재정운용 때문에 나라 망한다’는 식으로 비판하곤 했다. 당시 보도를 몇개만 들춰보면 "국책 연구기관 전문가들까지 더 이상 침묵하기 곤란할 만큼 상황이 악화"(나성린, 중앙일보, 2007/1/31)됐다느니 "한국의 재정건전성이 갈수록 위협받고 있다"(동아일보, 2007/08/24) 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표만 놓고 보면 그런 걱정이 나오는걸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노무현 정부 집권 첫 해인 2003년 국가채무는 165.7조원이었지만 2004년에는 203.1조원, 2005년에는 248.0조원, 2006년에는 282.8조원, 2007년에는 298.9조원으로 300.. 2015. 12. 3.
노무현, 돌아온 김영삼 긴장 속에서 뉴스를 주시하며 사무실을 지키고 있습니다. 마침 오늘이 야근이라 어차피 비상대기해야 하는데 오늘은 더구나 한미자유무역협정 문제까지 있어서 긴장감을 더합니다. 한미FTA관련 변동사항을 지켜보면서 노무현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과거 이런 얘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2002년 대선 당시 대선후보 토론회 사회자를 맡은 한 인사가 토론회가 끝나고 노무현을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노무현 후보는 돌아온 김영삼이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최근 그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돕니다. 정권 초기 엄청난 기대와 지지를 받았습니다. 초기에 개혁에 대한 기대도 높였습니다. 하지만 점차 여러 상황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 속에는 오만한 자신감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세계.. 2007. 3. 31.
월남민과 역대 정권, 대선 때마다 ‘주고 받기’ (2005.1.14) 월남민들은 대통령 선거 때마다 일관되게 보수성향 표심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역대정권과 대선 국면에서 정치적 거래를 한 내역이 밝혀졌다. 특히 이북5도청사 건립, 임진각 통일전망대 운영권, 월남민 공원묘지 경모공원 설립, 동화은행 설립 등은 모두 1987년 당시 노태우 후보가 자신을 지지하는 조건으로 허가해준 것이다. 이같은 사실에 대해 이경남 한국발전연구원 원장(전 동화연구소장)은 이승만 정권부터 노태우 정권까지 월남민과 정부의 관계를 “주고받기(Give and Take)”로 표현했다. 그는 “노태우 당선에 이바지하는 조건으로 은행설립과 공원묘지 허가, 5도청 건립을 제시했고 노태우 후보가 이를 승낙했다”며 “이북5도민은 노태우 후보에게 표를 결집해줬다”고 회상했다. 이북도민회는 지금도 통일전망대 운영을.. 2007. 3.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