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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사해/한반도-동아시아

상륙작전, 화려한 주인공 뒤 숨은 일꾼들도 되돌아봐야

by betulo 2023.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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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쓰는 용어에 스내푸(SNAFU)라는 게 있다. ‘Situation Normal: All Fucked Up’을 줄인 말인데 ‘상황 이상 무: 실제로는 엉망진창’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런 말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1941년 8월 미 육군과 해군이 노스캐롤라이나 머틀 비치라는 곳에서 사상 최초로 실시한 대규모 합동훈련을 꼽을 수 있겠다. 외국 해안을 공격해야 할 상황에 대비한 모의침공훈련이었다. 요즘이야 대규모 상륙훈련을 한다고 하면 전투기와 전함과 헬기와 해병대가 잘 만든 액션영화 격투장면처럼 딱딱 맞아 떨어지는게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엔 전혀 그렇질 못했다. 


탄약은 물에 흠뻑 젖어버렸다. 전투식량을 담은 카드보드 상자는 아예 찢어지는 바람에 통조림 무더기가 해변에 밀려들었다. 탱크는 연약한 지반에 푹 꺼졌다. 바닷물을 헤치고 겨우 상륙한 값비싼 장비들은 곧바로 녹이 슬기 시작했다. 이 모든 엉망진창이 파도도 없고 적군도 없는 잔잔한 해변에서 한낮에 벌어진 일이었다. 애꿎은 군인들이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촬영한 기록영상이라도 있었다면 두고두고 미군을 골려 먹는 소재가 되기에 부족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1941년 상륙훈련 당시 모습은 <미국, 제국의 연대기>에서 발췌했음.)


실망하기엔 이르다. 머틀 비치에서 미 육군 공식기록에서 ‘실망스러운 경험’이었다고 기록한 이 훈련이 있고 나서 3년 뒤인 1944년 6월 미군이 주도하는 연합군은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상륙작전을 시도했다. 연합군 16만명이 암구호 ‘플래시/썬더’와 함께 영국 해협을 건넜고 함정만 해도 6939대가 동원됐다. 그리고 멋지게 성공했다. 


상륙작전은 전쟁의 기본 개념을 적잖이 바꿔버렸다. 군수혁신과 통신혁명, 무기체계 고도화가 어우러져 이제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신속하게 이동시킬 수 있게 됐다. 전근대시대 전쟁에서 사용하던 전방 후방 개념 자체가 의미가 없어졌다. 전형적인 사례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아닐까 싶다. 유엔군 7만 5,000명과 함정 261척이 동원된 이 상륙작전은 엄청난 조수간만 차, 넓고 긴 갯벌, 좁은 단일 수로 등 쉽지 않은 여건을 극복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됐다. 낙동강전선까지 남하했던 인민군은 앞뒤로 고립됐다. 급하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주력이 붕괴됐다. 


인천상륙작전 이야기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후속편이 있다. 그리고 이 후속편은 인천상륙작전만큼 유쾌하진 않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자마자 맥아더는 원산에 상륙작전을 계획했다. 하지만 원산상륙작전을 위해 동원된 미 제10군단이 서해에서 남해를 거쳐 원산 앞바다까지 이동하고, 거기다 원산 앞바다에 설치된 200개가 넘는 기뢰를 제거하는 동안 한 달 넘게 영흥만과 울릉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뱃멀미로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결국 미군은 10월 14일 인명피해 없이 원산상륙작전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육로로 북상해 10월 10일 원산에 먼저 도착한 한국군 1군단이었다. 맥아더의 똥고집에서 비롯된 원산상륙작전은 결국 전쟁을 끝내버릴 수도 있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그 동안 인민군은 재정비하며 죽다 살아났고 중국은 압록강을 넘어올 시간을 벌었다. 더구나 원산으로 대규모 병력을 분산시키는 바람에 장진호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원산에서 기뢰를 제거하던 중 폭발하는 한국 해군 소해정(YMS-516) 모습


확실히 인천상륙작전은 엄청난 성공작이었다. 하지만 극적인 성공이라는 달콤함은 곧바로 원산상륙작전이라는 또다른 ‘스내푸’를 잉태했다. 인천과 원산에서 벌어졌던 정반대 방향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버린 두 상륙작전을 생각할 때마다 눈길을 사로잡는 재미난 액션영화 뒤에 숨어있는 군수를 비롯한 지원 인력들의 노고, 병사들의 희생, 무엇보다 얼핏 밋밋해 보이는 전략수립의 중요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해서 그 점이야말로 1950년 당시 급박했던 역사에서 내가 가장 크게 얻는 교훈이었다.

 

해군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해군>에 기고한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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