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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사해/한반도-동아시아

조카가 군대에 갔다

by betulo 2023.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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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가 군대에 갔다. 머리를 빡빡 밀었다. 진해에 있는 훈련소로 입대했다. 해군 조리병으로 20개월을 복무한다는데, 해군이나 요리 쪽으로는 쥐뿔도 아는 게 없는지라 예비역 병장들의 트레이드마크인 ‘라떼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를 해 줄 수가 없었다. 그저 20개월은 금방이다, 휴가 나오면 용돈 많이 주겠다는 말만 하고 말았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간다’는 말을 해 준다는 걸 까먹었다. 조카가 휴가 나오면 그 얘길 마저 해 줘야겠다. 


내가 군대에 입대한 건 1월이었다. 경기 연천군이 그렇게 추운 곳인 줄 처음 알았다. 신병교육대에선 너무 추워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곤 했다. 그래도 힘든 26개월을 버티게 해 준 첫 번째 원동력이라면 신교대 내무반 한가운데 큼지막하게 걸려 있던 팻말 속 한마디가 아니었나 싶다. “백 번 참아 부모님 곁으로.” 

휴전선 근무를 하다가 무슨 일이었는지 연대본부에 갈 일이 있었다. 공중전화 앞에서 길게 줄을 서 있었는데 나이 지긋한 원사가 다가왔다. 담배를 한 대 권하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요즘은 군대에서 때리거나 그러진 않지? 

그런 유도신문에 넘어갈 짬밥이 아니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 우리 막내가 얼마 전에 군대에 입대했는데 말이야…. 

구타와 욕설의 상징과도 같은 행보관한테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다. 너무 당황해 그다음 말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때랑 비교해서 요즘 군대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육군 복무기간이 8개월 짧아졌고,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거기다 병장 월급이 100배(외환위기로 고통 분담을 한다고 ‘자발적’으로 월급 삭감했을 때와 비교하면 200배) 올랐다는 게 눈에 띄는 변화라면 변화겠다. 

솔직히 국방부 출입기자가 아니라면 계속 관심이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제대하면서 ‘군대 있던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고 결심하는 건 대한민국 개구리들의 흔해 빠진 클리셰 아니었던가. 하지만 막상 국방부를 담당하게 되니 군대 이야기로 하루 해가 뜨고 진다. 

자꾸 군대 얘기만 나오면 짧다면 짧았던 내 26개월과 비교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무기 보급이 제대로 안돼 문제라는 뉴스를 볼 때마다 신형 60mm 박격포를 지급받았는데 계산판은 없던 것이라든가, K4 고속유탄기관총은 받았는데 정작 운용차량이 없어 K4를 등에 메고 행군하던 전우들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게 뭐라고 열쇠부대 경력자들을 만나면 동문회 분위기가 돼 오구오구 하는 건 우스우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리 돼 버린다. 

국가안보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군대나 전쟁 경험이 있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강경론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길 들은 적 있다. 멀리 볼 것 없이 병자호란 때 ‘결사항전’을 가장 크게 외쳤던 건 군사훈련 한 번 받아 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비분강개했던 그 책상물림들 가운데 원수를 갚는다며 자원입대했다거나 자식들을 군대에 보냈다는 얘기는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다. 

“척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겉으로는 큰소리를 쳤지만 속으로는 화의(和議)가 성립되는 것을 실로 바라고 있었는데, 다만 실속없이 떠들어대는 주장[浮議]에 희생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분명하게 발언을 하지 못할 따름이었다”거나 “그 당시에 나라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다만 야단스럽게 다투어 과격한 일에만 힘썼다… 대부분은 분위기에 휩쓸린 논의였다”는 장유나 허적의 비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조카가 군인이 됐다. 또 몇 년 뒤엔 아들이 군대에 간다. 군대 문제가, 전쟁 문제가, 나아가 한반도 평화 문제가 더 절실한 문제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한반도 정세도 예사롭지 않은데 대만해협 긴장도 나날이 올라가는 게 현실이다. 자식을 군대 보낸 부모들이 원하는 건 전쟁에서 백전백승하는 국가보다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를 도모하는 국가가 아닐까 싶다. 조카가 ‘백 번만 참으면 부모님 곁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해군 훈련 모습. 해군 제공

2023년 4월25일자 칼럼을 수정보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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