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년에 400억 달러를 잃고 있다. 이건 끔찍한 거래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과 재협상(renegotiating)을 다시 시작했다. 해야만 한다.”
미국 백악관이 14일(한국시간) 공개한 이 발언에서 보듯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의 무역적자가 미국 경제에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다. 13일(한국시간)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역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이후 우리의 대(對)한국 상품수지 적자는 132억 달러에서 276억 달러로 배가됐고, 미국의 상품 수출은 실제로 줄었다”면서 무역적자를 개정협상의 명분으로 삼았다.
트럼프가 말하는 ‘글로벌 불균형’이란 결국 미국이 수출보다 수입을 더 많이 해서 적자가 늘어나고 중국 등 신흥국은 미국을 상대로 흑자를 낸다, 그러므로 무역적자를 줄이겠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은 물론 세계경제가 작동하는 방식, 즉 ‘달러 체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엉터리 진단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정치경제 분야 전문가들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가 줄곧 문제삼아온 ‘글로벌 불균형’은 따지고 보면 미국 달러가 무역을 통해 전세계로 흘러가 세계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이 세계에서 미국 채권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것에서 보듯 신흥국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 가운데 상당액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의 쌍둥이적자(경상적자와 재정적자)를 메꿔주고 미국 소비를 지탱해준다.
미국 달러는 사실상 기축통화로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수단이 된다. 반면 미국의 무역흑자는 해외에 있던 달러가 미국으로 유입된다는 것이고, 이는 곧 세계시장에서 달러 공급량이 줄어들어 유동성 위기를 부른다. 얼핏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세계경제를 이끄는 원동력은 바로 미국의 무역적자”라는 표현이 가능한 셈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달러라는 기축통화를 통해 누리는 지위를 포기하지 않는 한 무역적자는 숙명일 수밖에 없으며, 미국의 보호무역조치는 미국의 패권질서만 뒤흔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전창환(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은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의 무역적자야말로 세계경제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이 달러를 기반으로 세계경제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면 달러가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미국이 무역흑자를 내거나 저축을 높이고 소비를 줄이면 어떻게 될까.
조영철(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은 “물론 무역적자가 무한정 늘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에게 달러체제는 위태로운 줄타기일 수밖에 없다”면서 “트럼프 행정부는 헤게모니 국가로서 발생하는 부담을 모두 외국에 전가하려 한다. 그것이 세계경제에 불안과 갈등을 일으킨다”고 비판했다. 다만 그는 “현재 미국 경제가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라고 보지 않는다”면서 “‘러스트벨트’’(Rust belt·쇠락한 공업지대)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국내정치적 맥락을 위한 ‘약한 고리’가 한미FTA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정승일(‘새로운 사회를 위한 연구원’ 이사) 역시 비슷한 진단을 내놨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로선 주요 지지기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제조업 경쟁력이 약해지는 것은 곧 트럼프 지지층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은 달러체제를 포기하지 않는 한 보호무역을 하면 안되는 나라다. 그것이 패권국가의 운명”이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게 미국 서민층을 걱정한다면 한미FTA 개정이 아니라 최저임금 인상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꼬집었다.
조복현(한밭대 경제학과 교수)은 “만약 달러가 기축통화가 아니라면 그리고 무역수지만을 고려한다면, 미국이 달러 평가절하를 통해 무역수지 적자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하고 또 월가의 이해를 고려해야 한다면 무역적자는 피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전창환은 “전세계에 달러 공급이 줄어들어 전세계에 유동성 위기를 일으킬 수 있다”면서 “그런 면에서 보면 ‘트리핀의 역설’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트리핀의 역설’이란 준비 통화가 국제 경제에 원활히 쓰이기 위해 풀리려면 준비 통화 발행국의 적자가 늘어나고, 반대로 준비 통화 발행국이 무역 흑자를 보면 준비 통화가 덜 풀려 국제 경제가 원활해지지 못하는 딜레마를 가리킨다.
미국 예일대 교수였던 로버트 트리핀이 1960년 미국 의회 증언에서 제기한 이 이론에 따르면 기축통화 발행국이 국제수지 적자를 허용하지 않고 국제 유동성 공급을 중단하면 세계 경제는 위축되고, 재정적자 상태가 지속돼 달러화가 과잉 공급되면 달러화 가치가 하락해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진다. 트리핀은 특정국가가 아니라 국제공용 기축통화를 새롭게 만드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조복현은 “트리핀이 지적한 모순은 변동환율제로 바뀐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면서 “새로운 국제통화 사용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미국이 적절한 적자를 유지하면서 산업과 분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패권질서 자체를 뒤흔드는 행동을 벌이는 셈이다. 김양희(대구대 경제학과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기축통화국 지위와 무역흑자를 동시에 달성하는 건데 그건 불가능한 목표”라고 말했다. 정승일은 “트럼프 행정부로선 세계화로 인해 제조업 경쟁력이 약화되는 걸 외면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영철 역시 “핵심 지지층이 몰려있는 쇠락한 공업지역 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국내정치 필요가 이번 사태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중장기적으로 경제체질을 개선하고 일자리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 충격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영철은 “시장을 다각화하면서 특정국에 대한 의존도를 완화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복현은 “중간 정도 경제규모인 국가들 중 한국만큼 수출의존도가 높은 나라가 없다”며 “내수위주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영철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는 “교과서에도 나오듯이 거시경제정책의 최우선 목표 중 하나가 완전고용이다. 정부가 균형재정이란 도그마에서 벗어나 더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 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달러는 우리 화폐지만 인플레이션은 너희 문제다."(존 코널리 닉슨 행정부 재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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