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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

다섯에 돌잡고 프로 4년만에 이세돌 넘은 한국 바둑의 미래, 신진서 6단

by betulo 2017.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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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1: 2016년 11월 10일 중국 허베이성 랑팡에서 열린 신아오배 세계바둑오픈 16강전. 흑이 53수를 놓자 백이 돌을 던졌다. 대국을 시작하고 1시간 10분밖에 안됐다. 백돌을 잡은 팡톈펑 8단은 이날 패배로 1988년 바둑 세계대회가 생긴 이래 가장 짧게 끝나는 기록이라는 불명예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으며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백을 잡은 기사가 얼마나 수읽기가 탁월했는지 잘 보여준다(아래 왼쪽 사진 참조). 

 장면2: 2016년 11월 16일 중국 저장성 항저우에서 열린 LG배 4강전. 줄곧 유리했던 백이 164수에서 치명적인 패착을 하고 말았다. 결국 165수만에 당이페이 4단에게 백불계패. 흑을 잡았던 당이페이 4단조차 “(상대가) 갑자기 도무지 이유를 알기 어려운 실수를 하며 대마가 잡혔다”고 평가했다(아래 오른쪽 사진 참조). 


 팡톈펑을 상대로 보여준 놀라운 수읽기 능력, 당이페이조차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의아했던 패착은 모두 신진서(16) 6단의 가능성과 단점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이세돌 9단을 제치고 한국 바둑기사 랭킹 2위로 올라선 신진서는 선배 기사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 바둑의 미래”로 꼽는 차세대 대표주자다. 국가대표 감독 목진석은 지난 1일 기자간담회에서 “2000년대생 이후 가장 기대가 큰 기사”로 신진서를 지목했다. 지난 13일 맥심커피배 조추첨식에서 만난 서봉수 9단 역시 “가장 기대가 되는 재목” 세 명을 언급하면서 신진서를 첫 손에 꼽았다. 


 16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신진서는 “주변에서 기대가 큰데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첫 질문에 “그런 얘길 처음 들었을 때도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다”고 답했다. 신진서는 곧이어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만 생각하려 한다”라고 말했다. 겉모습은 10대 소년이지만 벌써 프로 5년차 연륜(?)이 느껴진다. 


사진제공 한국기원


 신진서가 바둑을 처음 배운 건 5살 때였다. 부산에서 20년 가까이 바둑학원을 운영하던 부모님 옆에서 바둑을 두기 시작한 신진서는 1년 뒤 인터넷 바둑에서 5단까지 올라섰다. 7살때는 아마추어 7단인 아버지를 처음 이겼다. 신진서는 “하루종일 바둑만 두진 않았는데 부모님 말씀으론 기력이 빨리 늘었다고 한다”면서 “아주 어릴 때는 이기는게 재미있어서 바둑을 열심히 두었다”고 기억했다. 


 부모님과 함께 서울로 이사한 2012년에는 입단에 성공했다. 2015년에는 이창호 9단(14세 10일)에 이어 역대 두번째 최연소 타이틀(15세 9개월 5일)을 획득했다. 2000년대생 바둑 기사 가운데 종합 기전에서 우승한 첫 기록도 갖게 됐다. 세계대회에서 결승에서 겨뤄보고 싶은 기사로는 커제 9단, 박정환 9단, 이세돌 9단을 꼽았다. “커제 9단과 대국을 한다면...음... 언제나 자신은 있죠. 헤헤.”


 스스로 생각하는 기풍은 무엇일까. 신진서는 “전투를 마다하지 않는다. 전투형에 가깝다”면서 “예전엔 실리 지향 전투형이었는데 요즘은 실리를 일부러 차지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배우고 싶은 프로기사는 커제 9단과 구리 9단”이라면서 “초반 포석부터 시작해 유리하게 지켜가는 바둑을 배우려 한다. 나 스스로 생각할 때 포석이 약한 것 같아서 커제 9단 기보로 공부를 많이 한다”고 밝혔다.


 국가대표 상비군으로서 신진서의 일과는 바둑으로 시작해 바둑으로 끝난다. 이날 인터뷰도 바둑공부를 하다가 잠깐 짬을 냈다. “아침에 8시쯤 일어나서 한국기원에는 10시 조금 전에 와요. 오후 5시까지 한국기원에서 공부하고요. 집에 가서는 인터넷 바둑 두거나 쉬거나 하죠. 책을 보면서 바둑 공부도 하고요. 자정쯤 자요.” 프로기사들 사이에선 신진서가 공부를 엄청나게 많이 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2016년 11월 LG배 준결승 패배는 신진서에게 1년 중 가장 기억하기 싫은 장면으로 남아 있다. 대국을 지켜본 한 프로기사는 “시간이 없던 것도 아니었는데 경솔했다”고 지적했다. 신진서는 “큰 실수를 했다. 그 날 대국이 끝나고 자책을 많이 했다”면서 “164수를 두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다른 곳 신경쓰다가 착각을 했다”고 말했다.


 현재 신진서는 한국기사로는 유일하게 신아오배 8강에 진출해 있다. 올해 주요 세계대회에서 한국 기사가 한 차례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면서 위기감이 높은만큼 신진서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신진서는 “혼자만 남은 만큼 책임감을 느낀다”면서도 “부담으로 하기보다는 승부를 내보고 싶다. 목표는 언제는 우승이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신진서 역시 이러다 한국 바둑이 중국에 밀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한다. 그는 해법을 “안정된 국가대표 제도”에서 찾았다. 신진서는 “중국은 오래전부터 국가대표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게 중국 기사들 실력 향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면서 “구리 9단조차도 국가대표에서 공부할 만큼 모두가 함께 공부하는 시스템이다”고 지적했다. 


 실전을 경험할 수 있는 대회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점도 아쉬워했다. 장고대국이 적어서 국제대회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점도 꼽았다. 신진서는 “중국 기사들은 100위권조차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실력을 가진 프로기사가 많다”면서 “당분간은 중국 우세가 계속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한국 바둑 프로리그에서 정관장 황진단 소속으로 활동하는 신진서는 중국 갑조리그에서도 속해 있다. 1년에 대국이 15차례 정도 있기 때문에 중국을 자주 왕래하며 중국 바둑을 접할 기회가 많다. 신진서는 중국 기사들 가운데 자신과 가장 기풍이 비슷한 기사로는 셰허 9단을 들었다. 중국 기사 가운데 가장 경쟁력 있는 동년배로는 리친청 9단, 구쯔하오 5단, 셰얼하오 2단을 지목했다. 국내 기사로는 이동훈 8단, 신민준 5단을 꼽았다.  


 더 많은 이들이 바둑을 즐겼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신진서는 “바둑을 두면 기본적으로 차분해진다. 바둑은 반상 위에서만 겨루는 공정한 싸움이다. 자신이 정답을 만들어간다”고 말했다. 신진서는 “더 많은 분들이 바둑을 즐겼으면 좋겠다”면서 “솔직히 인터넷게임도 많이 해봤지만 바둑이 더 재미있다”고 강조했다. 


2014년 열린 제2기 합천군 초청 미래포석열전 결승에서 신진서(오른쪽)와 신민준(왼쪽)가 맞붙었다. ‘양신’(兩申)으로 불리는 두 기사는 2012년 나란히 입단해 한국 바둑을 짊어질 재목으로 평가받는다.


<2017.01.04. 추가>

 2017년 새해 첫 한·중 바둑대결에서 기대를 모았던 신진서(17) 6단이 중국 기사에게 패했다. 

 신진서는 4일 중국기원 항저우분원에서 열린 2016 이민배 세계신예바둑최강전 결승에서 미위팅(21·중국) 9단에게 219수만에 백 불계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1996년 1월 1일 출생한 프로기사가 출전하는 이 대회는 세계 바둑계를 이끌 차세대 기사들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신진서는 한국 랭킹 2위, 미위팅은 중국 랭킹 3위여서 한·중 바둑계의 자존심대결로도 관심을 모았다. 

 중원에 두터운 세력을 형성하려 시도한 신진서에 맞서 침투한 흑 대마를 놓친데 이어 패싸움 끝에 좌하귀를 내주고 말았다. 우하귀를 차지하는가 했지만 곧바로 상변에서 흑에 역습을 당하며 패색이 짙어졌다. 결국 신진서는 돌을 던지며 생애 첫 국제대회 우승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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