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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역사이야기

세종로에 있는 이순신 동상이 엉터리인 이유

by betulo 2015.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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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에게 이순신 하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세종로 네거리에 있는 동상일 것이다. 오른손에 큰 칼을 ‘들고’ 있는 거대한 동상은 수십년 동안 우리에게 이순신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런만큼 고증이 잘못됐다는 지적 또한 끊이지 않았다. 갑옷이 중국풍이라는 건 일반인들에겐 너무 어려운 문제라고 양보하더라도, 이순신이 왼손잡이냐 하는 지적 앞에선 반론의 여지가 없어진다. 거기다 이순신 스스로 밝혔던 “큰 칼 옆에 차고”고 아니라 “큰 칼 들고” 있는 모습은 한국에서 역사고증이 얼마나 관심밖에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11월27일 경남 창원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교육시설인 ‘통해관’ 앞 충무광장에서 열린 제막식에서 선보인 새 이순신 동상은 여러모로 반갑다. 왼손에 칼 대신 활을 잡고 등에 화살통을 메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장수가 착용하던 ‘두정갑’을 입었고 허리에는 환도를 찼다.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은 칼머리를 뒤로 가게 한 점이다. 세종로 동상이나 영화 '명량'에서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실망만 했는데 참 다행이다 싶다(이 기사를 참조).


해군사관학교가 이번에 큰 일 했네. 칭찬해주고 싶다. 동상을 잘 보면 왼손에 활을 잡고 칼머리를 뒤로 하게 한 환도를 차고 있다. 게다가 이순신 장군은 활쏘기가 일상생활이었다. 


새로 제작한 동상과 세종로에 있는 동상을 비고해보면 참 많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참고로 조선시대 무인들의 실제 모습을 확인해볼 수 있는 사진을 몇 장 올려본다. 사진을 보면서 조선시대 무인들의 복식을 검토해보자.


먼저 구한말 포도대장을 찍은 사진을 보자. 등 뒤로 화살통을 했다. 칼은 겨드랑이에 끼여 있는 모습인데 사실 칼은 의전용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칼은 단거리 백병전에 쓰는 것이고 활은 장거리 전투가 가능하다. 칼싸움해서 전투 승리하는건 영화에선 멋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뭐하러 위험하게 그렇게 하겠나. 그냥 화살 쏴서 죽이면 확실한데 말이다. 특히 한국처럼 산악지대에 산성 위주 방어전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활 위력이 극대화된다.



다음으로 정조능행반차도를 살펴보기 바란다. 칼머리를 뒤로 가게 해서 칼을 차고 있고 활통을 차고 있다. 이 그림에서 장용영 대장을 확대한 모습을 보면 조선시대 무인들 기본 무장형태가 잘 드러난다.



'안릉신영도'에서도 무인들 복식이 잘 드러난다. 안릉신영도는 1785년 황해도 안릉의 신임 현감이 부임하는 광경을 담은 행렬도인데 1786년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여기를 참조). 이 그림 중 현감을 확대해보면 해군사관학교 동상과 일치하는 활, 칼, 화살 등 모습을 볼 수 있다.

칼머리를 뒤로 가게 해서 칼을 차는 것은 사실 일본과 정반대다. 아무래도 칼을 위주로 한 전투방식과 활을 위주로 한 전투방식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 그림은 '동래부사접왜사도'를 보면 그런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그림은 18세기 동래부사가 초량 왜관에 온 일본사실을 환영하기 위해 행차하는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후기 기병전술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형국 박사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재연한 조선시대 무인들의 활쏘기 모습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당시 무인들의 복식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문제는 청나라 팔기군 복식과 연관성이다. 팔기군 복식을 보면 조선 무인들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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