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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경제雜說

'자유경쟁'이라는 환상

by betulo 2011.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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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욱(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이 쓴 <자본주의 역사강의: 세계체계 분석으로 본 자본주의의 기원과 미래>(2006, 그린비)를 다 읽었다. 세계체제론(백승욱 용법으로는 세계체계론)은 10년 전쯤 월러스틴이 쓴 <근대세계체제>를 읽으면서 관심을 갖게 됐는데 전지구적 차원에서 거시적인 시각을 견지한다는 점이 무척이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세계체제론이라는 분석틀을 통해 자본주의 역사를 조망하는 <자본주의 역사강의> 역시 적잖은 지적 즐거움을 선사했다. 세계체제론 입문서라고 할 만한 이 책은 특히 자유경쟁이라는 환상, 자본주의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아래 글은 방대한 책 내용 가운데 그 두가지 주제만 간략히 다뤄보고자 한다. 




백승욱(2006: 192~193)에 따르면 자유경쟁을 중시하는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동인도회사는 대표적인 국가독점기업으로, 국가가 모든 상업의 권한을 하나의 기업에 몰아주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영국도 원거리무역에 나서면서 똑같은 방식으로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것이다. 영국은 19세기 중엽에 가서야 동인도회사 독점권을 폐기한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스미스의 논리는 영국의 공식 이데올로기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영국은 보호주의 시대에는 스미스를 채택하지 않다가, 세계헤게모니에 올라서서 자유무역을 실시한 이후에 스미스를 이데올로기로 내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스미스는 영국의 세계적 독점을 보장하는 자유무역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죠(백승욱, 2006: 193)."  

자본주의는 국가라는 존재와 어떤 관계일까.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자본주의 기원에서는 국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야경국가'를 실체로 오해하게 만드는 이런 서술은 백승욱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참모습을 가리게 만든다.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규정하는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시장 위에 있는 상부구조'라는 것이다. 그의 삼층도식에 따르면 물질문명이 가장 하부에 있고 그 위에 시장경제가 있으며, 시장경제 위에 (자유로운) 시장경제에서 벗어난 게 바로 자본주의다.

 
"(브로델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누르고 경쟁을 배제할 수 있을 때, 즉 독점이 가능할 때만 비로소 자본주의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독점이 아니면 자본주의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이윤이 축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79-80쪽)."

그럼 독점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국가를 매개로 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국가의 지원 없이 경제 스스로의 논리에 의해 독점자본주의가 형성되지는 않습니다."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독점은 국내 뿐 아니라 세계까지 무대로 한다는 점이다. 독점을 위한 세계시장 경쟁에서 이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강한 국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강한 국가를 배경으로 세계시장을 독점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이고, 그것이 시장경제의 상부구조라고 설명합니다(81쪽)."

폴라니가 말하는 자본주의 역시 비슷한 양상을 띤다. 국내 시장 역시 국가가 정책을 통해 창출해 낸다. 가령 영국을 예로 든다면 이렇다. "영국은 16-17세기 네덜란드에게 계속 밀려서 네덜란드를 넘어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 과제는 개방을 넓혀감으로써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은 문을 닫고 보호주의로 돌아서 국내시장과 국내산업을 육성했습니다…. 영국의 시장은 영국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108쪽)."

산업혁명 역시 영국이라는 국가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산업혁명은 인도 면직물과의 경쟁 속에서 등장하는데, 나중에 조금 더 복잡한 과정을 겪으면서 인도에서는 결국 면직물 산업이 사라지게 됩니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한 후 인도를 면직물 생산지가 아니라 면화 재배지로 전환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국의 면직물 우위는 정치군사적 메커니즘을 통해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173-174쪽)." 

세계체제론을 대표하는 학자인 월러스틴이 말하는 자본주의는 어떨까요. 백승욱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자본주의에서 시장은 기본적으로 독점이나 준독점을 행사할 수 있는 시장이고, 이때 그 (준)독점은 국가에 의해서 지탱된다(191쪽)."

"(준)독점은 여러 가지 제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대표적으로 특허가 있죠. 그리고 어떤 새로운 제품을 집중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는 것, 수출입을 제한할 수 있는 것, 국가의 보조금을 줄 수 있는 것, 세금을 감면해줄 수 있는 것, 그리고 특정 상품을 국가가 사줄 수 있는 것 등이 모두 겉으로는 아닌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는 독점적 지분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혜택을 집중시키고, 다른 누군가는 피해를 입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자유시장은 없고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에 대한 정책적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이 시장이라는 것이죠(191쪽)."

그렇다면 도대체 자유경쟁이라는 건 실체가 없는 허꺠비 뿐인 걸까요. 백승욱은 자유경쟁이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합니다. 
 
"독점은 끝없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므로 이 독점을 향한 싸움에는 늘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두가지 불만이 있는데 하나는 싸움에서 밀려난 기업들의 불만입니다. ..두번째 불만은 세계시장 독점에서 밀려나, 이를 반대하는 국가들의 불만입니다…. 이처럼 독점에서 배제된 세력들이 많기 때문에 늘 독점에 대한 반대는 자유경쟁시장을 요구하지만, 스스로 독점적 지위에 올라서면 더 이상 자유경쟁 이데올로기를 액면 그대로 펼치지는 않습니다(192쪽)."

위에서 언급한 영국이 스미스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 딱 들어맞는 사례가 될 듯 합니다. 장하준(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가 지적하는 '사다리 걷어차기' 역시 같은 맥락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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