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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

경축! 민변 20주년

by betulo 2008.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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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법 제1조
(변호사의 사명)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 변호사는 그 사명에 따라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고 사회질서 유지와 법률제도 개선에 노력하여야 한다.

생각해보면 변호사법 제1조가 규정한 변호사의 사명을 말 그대로 제대로 실천한 게 민변이었다. 군사독재 시절 구속과 투옥을 각오하고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한 변호사들이 있었고 그들은 민변 회원들이었다. 불합리한 사회질서를 바로잡음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도 민변이었고 악법을 혁파해 법률제도 개선에 노력한 것도 민변이었다.

그런 민변이 20년을 맞았다. 기사를 쓰면서 민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민변이 겪는 도전은 곧 시민단체들이 겪는 도전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시민단체에 지극히 비판적이고, 또 그만큼 시민단체에 한없는 애정과 관심을 갖는 그만큼 민변을 바라보고 취재하고 기사를 썼다. (지면에는 분량상 하고 싶었던 얘기가 많이 빠졌다. 그 부분은 별도 표시를 했다.

개인적으로 민변의 도움을 아주 절실하게 받은 적이 있었다. 95년에 자세하게 밝히고 싶지 않은 이유로 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당시 총학생회에서는 민변에 연락을 해서 변호사를 주선해 줬다. 그 변호사는 성심성의껏 변론을 맡아줬고 덕분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

재판이 있고 얼마 후 나는 군대를 갔다. 그러다 보니 그 변호사 이름조차 까먹어버렸다. 혹시 기회가 닿는다면 그 변호사를 다시 만나 회포를 풀고 싶은데 말이다.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혹시 민변에 어느 변호사에게 어떤 사건을 맡겼는지를 알려주는 서류가 남아있을까? 물어나봐야겠다.


지난 9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고시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입법예고는 가축전염병 예방법이 농림부 장관에게 위임한 위임범위를 일탈한 위헌·위법한 고시”라고 주장했다. 민변은 11일에는 미국 관보까지 조사해 “미국이 한국을 속였거나 부실하게 협상에 임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국정조사를 요구했다. 민변의 주장 가운데 일부는 이미 사실로 드러났다. 

  위 사례는 법률전문가 조직이라는 강점과 사회민주화와 인권발전, 권력감시에 이바지하는 사회적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 민변이 오는 28일 창립 20주년을 맞는다. 전문성과 헌신성을 바탕으로 시민사회의 중심으로 성장한 민변. 하지만 경쟁격화와 시장화·상업화, 회원증가세 둔화와 정체성 약화 등 민변이 풀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20돐을 맞는 의미와 과제를 짚어봤다.


민주주의·개혁과 함께 한 20년


  “위원회는 침체돼 있고 각 분야 전문가 배출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시국사건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들의 결단으로만 좌우되는 상태이므로 회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동기개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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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5월 제13차 정기총회 내부토론에서 나온 발언들이다.

1995년 10월 월례토론회에서도 “장기적전망·기획능력과 실무능력 결여, 회원 확대에 따른 친목과 의사소통 부족, 재생산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런 고민들은 2008년 현재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제는 변호사들 스스로 자연스럽게 쓰는 “변호사‘시장’·‘고객’”이라는 표현은 환경 변화를 상징한다.

민변 회장 백승헌은 “예전에 비해 변호사로서 느끼는 생존 압박이 훨씬 커졌다.”면서 “변호사 영리활동 이외에 시간과 관심을 민변 활동에 두기가 점점 쉽지 않게 되는 상황”이라고 토로한다.


시장화·경쟁격화 등 대외적 도전 만만찮아


  민변 사무차장 송호창은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들은 업무강도가 무척 강하다.”면서 “말 그대로 너무 바빠서 참여가 힘들어지고 저조한 참여는 조직 동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는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민변 사무차장 조영선도 “변호사 숫자가 늘면서 경쟁도 커지면서 민변 활동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화와 로펌 대형화는 ‘민변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건국대 법대 교수 한상희는 “과거에는 개인사무실이라는 독립된 전문지식인으로서 활동했지만 점차 로펌이라는 조직 속에서 움직이는 변호사로 바뀌고 있다.”면서 “로펌 소속 변호사들은 이해충돌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년 전에는 민변 운동의 대항점에 국가권력만 존재했지만 이제는 자본권력이 더 중요해졌다.”면서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민변 회원의 경우 자본권력이 운동대상이자 고객이 되는 모순이 발생할 소지가 커졌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는 민변 회원확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민변에 정통한 한 시민운동가는 “신입회원이 이전에 비해 크게 줄었고 사법연수원생을 대상으로 환 회원확대작업도 지지부진하다.”며 우려한다.

1988년 창립 당시 51명으로 출발한 민변은 1998년에는 회원수가 240여명, 2000년에는 331명으로 늘어났고 지역조직까지 갖춘 전국조직으로 성장했다. 변호사 1만명 시대를 바라보는 현재 민변 회원은 550여명 수준이다. 조영선은 “사법연수원 기수당 평균 10∼15명 내외가 민변에 가입한다.”면서 “변호사 증가추세에는 못 미치는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내부혁신과 정체성 강화도 과제


  대외적 도전이 모든 것을 설명하진 못한다. 민변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조직의 활력을 높이는 ‘내부혁신’과 ‘정체성 강화’에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상희는 "민변 스스로 성격규정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민변의 가장 큰 약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변호사라는 전문 직업인 의식이 초창기 민변을 규정했던 운동성을 압도하거나 비등해졌다.”면서 “상당히 많은 민변 활동이 직업활동하다 남는 시간을 이용해 사회봉사하는 프로보노(변호사 공익활동)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직업적 이해관계를 떠나 전문지식을 이용해 비전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지성인’으로서 구성원의식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면서 “약자와 함께하는 초창기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상희는 이와 함께 “민변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나치게 ‘법’, 그것도 ‘국내법’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소송이나 헌법소원에만 의존하게 되면서 오히려 민주주의·인권담론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인권연대 사무국장 오창익은 “민변의 가장 큰 강점인 ‘전문성’을 제대로 못 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미FTA 논쟁에서 송기호 변호사 등이 보여준 활약은 놀라운 것이었고 다양한 사안에 활발한 사회적 발언을 하고 있다.”면서도 “한가지 사안을 천착하는 변호사를 보기 어렵고 민변 소속 각 위원회의 전문성이 축적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주장했다.


  오창익은 이어 “민변 활동은 자유권(시민·정치적 권리)에 비해 사회권(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이 약하다.”면서 “이는 변호사들이 누리는 경제적 지위와도 연관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민변 구성원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송호창은 “인권변호사단체에서 진보적 법률가 단체로 발전하려 노력하고 있다.”면서 “정책을 생산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활동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그는 “위원회 활동 강화를 통해 전문성을 높일 계획”이라면서 “전문성 강화를 위해 5월부터 상근변호사를 기존 1명에서 2명으로 늘렸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희망은 민변”


  사법연수원 2년차 김화철은 변호사가 되면 민변에 가입할 생각이다. 대학 시절 시위에 몇 번 나간 걸 빼고는 학생운동과 전혀 인연이 없었다는 그는 고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민변을 알게 됐다. “민변은 사회경제적 약자를 돕는 공익적 활동에 열심히죠. 저도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그는 “사법연수원 노동법학회, 통일법학회, 인권법학회 등에서 하는 초청강연 등을 빼고는 민변 활동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면서 “민변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동참할 의사가 있는 사법연수생들이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이러저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한결같이 “그래도 희망은 민변”이라며 민변에 대한 높은 사회적 기대를 강조한다. 오창익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민변은 믿을만한 변호사를 만날 수 있는 창구”라면서 “민변을 통해 단련된 법조인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인큐베이터’ 구실을 해주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대한변협 사무총장 김현은 “민변 20년을 축하한다.”면서 “부강하고 기본권이 신장되는 사회를 위해 계속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시변) 사무총장 이헌도 “최근 쇠고기협상에 대해 논리적이고 치밀하게 접근하는 열정과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면서 “그게 바로 국민들이 기대하는 민변의 모습일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신문 2008년 5월 14일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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