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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생각한다/경찰 개혁론

창설취지 소멸, 정권안보 방패막이

by 자작나무숲 2007. 3. 25.

[경찰개혁] 시위진압 전투경찰의 역사와 오욕

2005/9/1


경찰청 경비국 경비과 경비2계는 지금도 경찰관들 사이에서 ‘진압계’로 통한다. 경찰청 홈페이지를 보면 경비2계는 △경찰기동대 및 진압부대의 운영 지도 △전압부대에 대한 교육 훈련 및 검열 △진압장비의 연구개발 등의 일을 담당한다. 경찰 스스로 ‘전의경=시위진압’이라는 공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경찰은 대한민국보다도 먼저 생겼고 한국군보다도 역사가 오래 됐다. 해방 직후 경찰이 미군정과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지키는 군사력으로 자리매김하면서부터 한국 사회는 치안과 군사가 뒤섞인 채로 60년을 보냈다. 무장탈영병을 잡는다고 군대가 민간인을 검문해도 의문을 가지지 않고 군경합동검문소도 그러려니 한다. 


이런 ‘관행’의 결정판이 바로 ‘경찰복을 입혀놓은 군인’인 작전전투경찰순경(전경)과 의무전투경찰순경(의경)을 24시간 출동대기시키는 것이다. 대간첩작전을 목적으로 창설된 전투경찰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시위진압이다. 결국 시위진압이 전투경찰을 만든 진짜 목적이고 대간첩작전은 핑계였거나 혹은 집회·시위를 하는 ‘불순세력’을 진압하는 것이 곧 대간첩작전이라고 생각해 전투경찰을 창설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전투경찰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8년 10월 치안국에 비상경비총사령부가 설치돼 전국의 모든 전투경찰을 지휘하면서부터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태백산과 지리산에 은거하고 있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1951년 12월 태백산 지구 경찰대, 지리산 지구 경찰대가 편성됐다. 1953년 5월 1일에는 서남지구 전투경찰대가 설치돼 지리산 주변의 전투와 치안을 담당했고 1955년 7월 1일에 해체된다. 같은 날 경찰직무응원법 제4조에 의거 경찰기동대가 설립됐다. 


1970년 12월 31일 전투경찰대설치법이 제정되면서 그동안 일반경찰로 구성된 전투경찰이 군복무를 대신하는 청년들로 바뀌게 된다.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교수는 이를 “한미상호방위조약 군대정원규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청와대의 직접적이고 독자적인 지휘에 복종하고 군사독재타도투쟁을 진압할 수 있는 군대식 조직을 갖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1975년에는 법개정을 통해 대간첩작전 말고도 경비임무로 확대되고 반정부시위, 파업 등 현장에 공공연히 투입된다. 처음부터 사실상 시위진압용 부대를 목적으로 했던 전투경찰은 30년이 넘도록 ‘시위진압의 최선봉’으로 활약하고 있다. 


1991년 당시 전투경찰이었던 박석진씨가 전투경찰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대간첩작전은 범죄예방, 진압 등 공공의 안녕과 질서유지라는 경찰의 본래 임무와도 관련되므로 치안업무보조에 전투경찰을 동원하는 것은 위헌이 아니다’며 1995년 5:4로 합헌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헌법재판관 4명은 소수의견에서 “무장공비가 준동하는 사태가 없는 한 통상의 불법한 집회시위 진압 등 순수한 경찰업무는 전투경찰대의 임무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5:4라는 근소한 차는 전투경찰 논쟁의 불씨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 대목이다. 


전투경찰 폐지논쟁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입영대상자가 갈수록 줄어들면서 국방부가 전투경찰 차출에 난색을 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방부는 2008년까지 군병력을 4만여명 감축하고 전투경찰 등도 점진적으로 축소운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경찰청은 지금처럼 190개 중대(기동중대와 방범순찰대)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8월 31일 경찰개혁토론회에 참석한 김성진 경찰청 경비국 전경관리계장은 “지금 당장 전투경찰을 없애면 그 공백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며 “당장은 전투경찰이 필요하다”이 밝혔다. 그는 “전투경찰의 빈자리를 정규경찰로 메물 수 있다면 경찰청에서도 미련 없이 전투경찰을 없앨 것”이라며 “예산문제 등으로 인해 그게 쉽지 않다”고 밝혔다. 


한편 김 계장은 “전의경제도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독특한 제도이며 경찰에서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한 뒤 내무반 환경개선, 정훈교육 강화, 외부인사 초청 강연, 급식문제 해결 등 다양한 ‘개선책’을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전의경이 군사독재의 방패 구실을 했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지만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김 계장에 따르면 “80년대 후반부터 극심한 노사분규 한번씩 겪지 않은 곳이 없는데 중간 구실을 전의경이 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장에서 대화로 해결되지 않을 때 전의경들이 부상을 입으면서도 중간에서 격렬한 대립을 이성적인 대화로 끌어가도록 도움 준 부분도 있다”는 희한한 평가를 내놓았다. 


2005년 9월 1일 오후 15시 31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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