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한 적이 있다. 2005년 1월이었으니 벌써 19년이나 됐다. 돌이켜보면 일본을 처음 갔는데도 일본의 단점만 눈에 들어왔다. 단점만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 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폭탄 피해자들을 추모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히로시마 한가운데 들어선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느꼈던 불편한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당시에 쓴 글에는 이렇게 돼 있다. “ 안내 팜플렛 어디에도 ‘가해자 히로시마’는 없다. 오로지 ‘피해자 히로시마’가 있을 뿐이다. 짤막하게 소개된 군국주의화와 조선인 강제징용 등은 구색맞추기라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그나마 몇 년 전에는 그런 내용조차 없었다고 한다.” 혼자 과격한 게 아닌가 싶어 히로시마에서 만난 재일동포 시민운동가에게 물어봤는데, 그 역시 이렇게 말했다. “가해는 기억하지 않고 피해만 기억하도록 함으로써 피폭이라는 기억을 체제 속에 포섭해 버린다.”
최근 인권연대 운영위원이 쓴 책(오항녕, 2024, <사실을 만난 기억>, 흐름출판사)을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세간에 상식처럼 거론되는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벌어진 기축옥사에서 전라도 선비들이 큰 피해를 입었고, 그 뒤 전라도는 과거급제 등에서 여러 차별을 받았다’는 인식을 검증한다. 검증 결과는 너무나 명확하다.
정여립이 전라도 전주 사람이고 주요 활동무대도 그 주변이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희생된 사람이 많은 건 불가피했다. 하지만 과거급제자 통계를 살펴보면 기축옥사 이후 전라도가 차별을 받았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500년 동안 과거급제자의 이름과 고향, 조상까지 개인신상정보를 철저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과거급제자 통계의 정확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차별받는 지역’이라는 인식은 사실관계와 무관하게 흔하다. 대표적으로 호남차별론은 현대 한국사회에선 엄연한 진실이지만, 그 뿌리를 조선시대 심지어 고려시대까지 캐다보니 배가 산으로 가버렸다. 당장 고려 태조가 ‘훈요십조’에서 호남차별을 언급했다는 얘기가 많이 거론되지만 연구가 쌓일수록 근거가 없다는 쪽으로 정리되고 있다.
당장 고려 태조의 최대 지지기반이 전라도 나주였다. 태조의 후계자인 혜종의 외가집이 나주다.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을 홀대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말이 안된다. 조선 태조는 아예 ‘전주 이씨’다. 전주는 조선시대 내내 특별한 지위를 누린 도시였다. 기축옥사 얘기 역시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실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홍경래 난(1811~1812)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인지 서북(평안도) 차별론도 광범위하게 상식처럼 통용된다. 물론 최근 연구에 따르면 역시나 근거가 적다. 일단 평안도는 군사와 외교적 가치 때문에 중앙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는 조세특례지역이었다. 대외무역 중심지라 가장 부유한 곳이기도 했다. 서북 출신들이 과거급제에서 차별받았다는 얘기가 많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문과와 무과 급제자 가운데 8%가 평안도로 서울과 경기에 이어 가장 많다. 인구비중을 감안하면 차별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결국 “차별받는 서북인”이란 반란세력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했다.
‘피해자’ 의식은 힘이 세다. 함께 피해를 봤다는 인식은 ‘우리’를 강하게 의식하게 만들어 동질감과 단결심을 높인다. 가해자인 ‘저들’까지 함께 생각하게 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제3자가 보기엔 남사스러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가령 중국은 ‘100년의 치욕’을 강조하고 딱히 틀린 얘긴 아니겠지만 이런 얘긴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할 때는 분위기 봐 가면서 하는 게 좋겠다. 핵폭탄 피해는 분명 마음아픈 얘기지만, 희생자 가운데 10% 이상이 식민지조선 출신이었다는 것 역시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피해자 의식이 좀 더 심해지면 적개심이 자라나고 자칫 우리가 저들에게 가해자가 됐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피해자니까’ 하며 분명한 현실에 눈을 가리게 될 수도 있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하는 짓을 보자. 가해자와 피해자를 익명처리한 뒤 사실관계만 건조하게 나열한다면 가해자가 나치 시절 독일이 아닌지 헷갈린다는 말을 들어도 크게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최근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손흥민과 황희찬이 나란히 인종차별 피해자가 됐다. 먼저 손흥민은 토트넘에서 함께 뛰는 동료인 로드리고 벤탄쿠르가 지난달 우루과이 방송과 인터뷰에서 "난 당신의 유니폼을 가지고 있다. 다른 유명한 한국인 선수 유니폼을 줄 수 있냐"라는 질문을 받자 “손흥민 사촌 유니폼은 어떤가. 어차피 다 똑같이 생겼는데"라고 대답했다. 황희찬은 최근 연습경기에서 이탈리아 프로축구 코모 1907 소속 선수한테서 인종차별 발언을 들었다. 보도에 따르면 코모 소속 한 선수가 "동료에게 '황희찬을 무시해라. 그는 자신을 재키 챈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손흥민과 황희찬조차 인종차별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많은 국내 축구팬들이 이 사건을 주목하며 인종차별에 분노했다. 이 분노는 정당하다. 인종차별은 발언이건 행동이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맞다. 그럼 이런 사건은 어떤가.
지난해 한 프로축구 팀 선수들이 인스타그램으로 동남아시아 선수를 조롱하는 대화를 나눴다. 한 선수가 피부가 까무잡잡한 편이라고 다른 선수들이 놀리면서 인종차별 발언이 나왔다고 한다. 거기다 이 동남아 출신 선수는 경쟁관계에 있는 팀 소속이라 논란이 더 커졌다. 결국 문제의 대화를 나눈 선수들은 사과문을 올렸다. 이 선수들은 제재금 1500만원과 한 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냉정히 말해서 ‘솜방망이’ 징계라는 비판을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손흥민, 황희찬이 피해를 입었다는 인종차별 발언과, 한국 프로축구 선수들이 가해자가 됐다는 인종차별 발언은 과연 얼마나 다른가. 손흥민과 황희찬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한 선수들이 한 경기 출전정지 정도 징계를 받는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혹시 우리는 우리가 피해자일 때만 더 크게 분노하는 것은 아닌가.
인권연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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