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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사해/한반도-동아시아

‘비목’ 모티브 됐던 6·25 격전지에서 되새기는 오늘, 정전 70주년의 의미

by betulo 2023.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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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출입통제구역(민통선)에 들어서자마자 가파른 산길이 나타났다. 35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45도는 넘을 것 같은 가파른 언덕을 넘자 이번엔 밑으로 뚝 떨어질 것 같은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롤러코스터같은 보급로를 따라 한시간 남짓 달린 자동차는 강원 철원군 820고지에 자리잡은 7사단 중대본부에 도착했다. 사방을 둘러보면 밀림만 끝없이 이어진다. 강원 철원군과 화천군 일대를 지키는 휴전선이 길게 이어지고 점점이 자리잡은 일반전초기지(GOP)만이 이 곳이 70년 전 치열했던 백암산 전투 현장이고, 전쟁의 아픔을 노래한 국민가곡 ‘비목’(碑木)의 모티브가 됐던 곳이라는 걸 느끼게 해줄 뿐이다.


“전망이 좋은 곳일수록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치열한 전투는 곧 수많은 전사자와 실종자를 의미합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 안순찬 팀장은 “혹서기에 잠시 중단됐던 백암산 일대 유해발굴사업을 다음달부터 재개한다”면서 “이 부근은 특히 정전협정 체결 직전 사실상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 의미가 남다르다”고 강조했다. 2007년 국방부 직할기관으로 창설된 국유단은 6·25 전사자 유해발굴과 신원확인을 담당한다. 현재까지 국군전사자 약 1만 1000여구를 발굴했다.


중대본부 옆 오솔길로 오르자 과거 유해발굴을 했던 곳이 보였다. 나무 뿌리를 파헤친 게 눈에 띄었다. 신진욱 조사담당은 “나무가 유해를 좋아한다. 지금까지 발굴한 유해는 대부분 나무 뿌리가 휘감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나무 밑바닥까지 땅을 파내야 한다”고 들려줬다.


백암산 전투는 정전협정 조인 직전인 1953년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강원 화천군 북쪽 백암산 부근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였다. 정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중공군 제60군이 최후 공세에 나서 백암산 일대를 점령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육군 제5사단이 반격에 나섰지만 험난한 지형과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격이 지체되자 제6사단 7연대가 5사단에 배속돼 백암산을 우회해 북쪽으로 진출한 뒤 백암산 정상을 탈환했고, 이어 철원군 내성동리와 등대리 방면으로 전진해 금성천-북한강 방어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 방어선이 그대로 군사분계선이 되면서 당시 방어선을 따라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 70년째 계속되고 있다.

국유단 관계자들이 강원 철원군 백암산 전투 현장에서 지도와 실제 지형을 비교하며 살펴보고 있다. 왼쪽부터 이창용, 안순찬, 신진욱.


당시 제5사단은 중공군 3761명을 사살했지만 570여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는 피해를 입었다. 수많은 유해가 수십년 동안 제대로 수습이 안된 채 방치됐다. 1960년대 백암산 일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한명희 작사가가 ‘비목’ 가사를 쓴 계기 역시 무명용사 무덤에 이름도 없이 나무만 세워둔 모습이었다고 할 정도다. 신진욱은 “한 할아버지 증언을 들은 적이 있는데 자신이 전사자들 시신을 모아 태우는 일을 했던 경험을 들려주면서 서럽게 울던 게 기억난다”면서 “그 할아버지가 증언했던 곳에서 실제 유해를 찾아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유해발굴은 한국과 미국, 중국측 자료를 교차검증하는 문헌조사에서 시작한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구술조사도 빼놓을 수 없다. 전쟁 당시 지도와 대조하며 현장을 답사하는 현장조사까지 거친 뒤 구체적인 발굴지역을 선정한다. 등산로도 없는 험한 산을 수십번씩 오르내리는 게 다반사다. 아예 산에서 야영을 하기도 한다.


1년에 8개월 가량이 출장인데다 여비규정상 출장비 지급기준이 5만원(시도 기준)에 불과해 자비로 밥을 사먹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들을 움직이는 건 “선배 전우에 대한 책임감”이다. 이들은 입을 모아 “유해발굴은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는 작업”이라고 강조한다. 안 팀장은 부사관으로 근무할 당시 우연히 유해발굴사업을 알게 된 뒤 “군인으로서 보람있겠다”는 생각에, 신 조사담당은 대위 전역 뒤 민간기업에서 일하다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소명감 때문”에 자원했다. 대학원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다 지난해 합류한 ‘막내’ 이창용 조사담당은 국방부 근무지원단에서 운전수로 복무할 당시 중국군 유해 송환 버스를 운전했던 인연이 있다.


유해발굴을 하는 이들은 “비무장지대(DMZ) 남북공동 유해발굴이 하루빨리 재개되면 좋겠다”는 소원을 숨기지 않았다. DMZ 유해발굴사업은 2018년 남북 9·19군사합의로 2019년 3월부터 2021년 6월까지 철원군 화살머리고지에서 실시됐다. 2021년 9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는 백마고지에서 진행했지만 올들어 잠정 중단된 상태다.


화살머리고지와 백마고지 유해발굴을 현장에서 이끌었던 경험이 있는 안순찬은 “DMZ에 묻힌 국군 전사자 유해는 1만여구로 추정된다”면서 “DMZ는 인위적인 훼손이 거의 없기 때문에 유해발굴에 성과가 더 클 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도 유해가 70년이나 되면서 훼손이 많이 진행됐다. 더 늦기 전에 남과 북, 거기에 미국까지 함께 공동으로 DMZ 유해발굴사업을 해서 유족들 품으로 되돌려 보내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강원 철원군 민통선 유해발굴 현장에서 발견한 M1 탄피. 전투가 치열했던 곳에선 이런 탄피가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서울신문 도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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