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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시민의신문 기사

94년엔 2기 한총련, 04년엔 2기 의문사위? (2004.7.15)

by betulo 2007.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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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엔 2기 한총련, 04년엔 2기 의문사위?
수구언론 ‘사상적 편향성’ 색깔공세…인권단체 반발
조중동, 무차별 마녀사냥
2004/7/15
강국진 globalngo@ngotimes.net

“1994년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언론이 벌이는 마녀사냥의 희생양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의문사위가 그 대상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중동 등 일부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다. 시민사회에서는 “1994년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 발언 이후 몰아쳤던 매카시즘 광풍이 다시 불고 있다”며 강력대응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수구언론이 의문사위를 개혁의 ‘약한고리’로 파악하고 조직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에 따라 인권운동사랑방, 민가협, 천주교인권위원회 등 인권단체들이 “시대착오적 마녀사냥을 즉각 중단하라”는 긴급 성명을 발표하는 등 시민사회단체의 연대성명 발표가 잇따를 예정이다.

 

수구언론 여론 호도

 

한총련은 1994년 “한총련의 배후에 사로맹이 있고, 사로맹 배후에 사로청, 사로청의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는 박 전 총장의 발언에 이은 공안탄압으로 수백병이 구속되는 홍역을 치렀다.

 

당시 언론은 박 전 총장 발언 받아쓰기를 넘어 ‘주사파’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공안탄압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박 전 총장은 자신이 한 발언의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고 주사파 파문은 허깨비소동으로 끝을 맺었다. 시민사회운동가들 사이에선 “수구언론이 10년전 김영삼 정권을 길들이기 위해 주사파 파동을 일으켰듯이 다시 한번 의문사위를 희생양삼아 개혁을 좌절시키려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지난 12일 의문사위가 국방부 발표에 대해 반박하는 기자회견에서 발표를 하던 관계자
             가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연합>



조선일보는 지난 15일 “의문사위 조사관 중 3명 ‘간첩활동․시국사범’”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조사관 K씨, H씨, L씨가 과거 간첩죄․반국가단체가입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사람들”이라며 색깔공세를 폈다. 중앙일보․동아일보도 곧이어 같은 내용을 보도하며 의문사위의 ‘사상적 편향성’을 문제삼았다. 그러나 이들 조사관들은 모두 사면, 복권된 사람들로 공개채용 과정에서 신원조회도 모두 통과하는 등 조사관 채용에 전혀 하자가 없는 사람들이다.


수구언론의 과거청산 무력화 시도는 현직군인의 총기위협 사건 보도와 비전향장기수 민주화 인정 보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지난 12일 의문사위원회가 ‘허원근 의문사 사건’ 조사 과정에서 “관련자료를 가지고 있던 인 상사가 위원회 조사관을 권총으로 위협했다”고 발표하자 인 상사는 “권총이 아니고 가스총이었으며 의문사위 조사관이 자신을 회유했다”고 반박했다.

 

진실과 은폐 세력 싸움

 

민언련은 “의문사위 조사관들이 개별사안을 처리하면서 잘못을 저지른 게 있다면 그것대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전제한 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의 본질이 ‘과거청산을 추진하는 위원회와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 사이의 갈등’임에도 보수언론들이 이를 ‘국가기관들 사이의 알력․충돌’로 규정하고 문제의 초점을 두 기관사이의 공방에 맞추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민사회단체청년활동가모임은 지난 14일 긴급성명을 내고 “국방부, 수구언론, 수구집단들은 의문사위 뒤흔들기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지난 13일 모임을 연 이들은 “1994년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다”며 “위기의식을 느끼는 극우세력과 수구언론이 의문사위를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자와 만난 의문사위 조사관들도 “일부언론이 지엽적인 문제로 물타기하려는 국방부 얘기만 듣고 기사를 쓴다”며 언론보도 태도를 비판했다. 의문사위는 지난 13일 연합뉴스가 보도한 ‘의문사위, 실세 친분빙자 군인 회유’ 기사와 ‘의문사위, 현정부 실세 거론 녹취록 전문’ 기사에 대해 “기사 내용은 인 상사의 일방적인 진술일 뿐”이라며 정정보도를 촉구하기도 했다.

 

조영민 의문사위 조사관은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9조는 ‘위원회는 의문사 사건의 진상을 밝히거나 증거·자료 등을 발견 또는 제출한 자에게 필요한 보상 또는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그는 “인 상사와 7-8차례 만날때마다 인 상사는 신변위험을 호소했다”며 “불익익을 당하지 않게 하도록 안심시키는 나온 말일 뿐 회유는 결코 아닌 걸로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가스총은 괜찮다?

 

특히 조선일보가 ‘권총이냐 가스총이냐’를 핵심 쟁점으로 삼은 데 대해 “인씨가 쏜 것이 가스총이면 국방부가 진실게임에서 승리했다고 보는 것이냐”며 꼬집고 “가스총이든 권총이든 인씨가 총기를 발포하면서까지 의문사위 활동에 저항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의문사위의 ‘피진정기관’인 국방부․국정원․기무사․경찰 등이 의문사위의 자료요청과 진상규명조사에 매우 비협조적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다.


보수신문들은 지난 1일 의문사위가 비전향장기수 세 명의 죽음을 의문사로 인정한 것을 두고서도 ‘간첩을 민주화운동인사로 둔갑시켰다’는 식의 주장을 펴며 의문사위를 흔들어왔다. 그러나 의문사위의 발표한 내용의 핵심은 간첩활동이 민주화운동이라는 게 아니라 그동안 자살 등으로 은폐됐던 이들의 죽음이 권위주의 정권아래 자행된 반인권적인 전향공작에 의한 것이었으며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폭력에 맞선 행위가 민주화와 연관된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강국진·조은성 기자 globalngo@ngotimes.net



 허원근 일병 사건 일지


▲1984년 4월 2일 = 허 일병, 가슴과 머리 등에 3발의 총을 맞고 사망.


▲1984년 4월 30일 = 육군 7사단 헌병대, 자살로 결론 내림


▲2001년 1월13일 = 의문사진상규명위, 허 일병 의문사 조사 착수.


▲2002년 8월20일 = 의문사진상규명위, 허 일병이 술취한 중사의 총에 맞아  숨졌다고 중간조사 결과 발표.


▲2002년 8월27일 = 국방부 특별조사단, 허 일병 사건 조사 착수.


▲2002년 9월10일 = 의문사진상규명위, 허 일병이 내무반과 폐유류고에서 총에 맞아 타살됐다고 최종 결론.


▲2002년10월29일 = 국방부 특별조사단 중간조사결과 발표 ‘사건 당시 내무반에서 총기오발 사고 없었다’ 발표.


▲2002년11월28일 = 국방부 특별조사단 최종 조사결과발표, ‘허 일병 자살, 의문사위가 허 일병 사건을 타살로 조작’ 발표


▲2003년 10월 30일 = 의문사위 허 일병 사건 조사 재개 결정.

▲2004년 2월 26일 = 의문사위 조사관들 인 상사 집에서 자료 확보 과정에서 인 상사 총 쏘며 위협 (주장)


▲3월 6일 = 정 대장(전 국방부 특조단장) 의문사위 조사관들 협박 (주장)


▲6월 18일 = 의문사위, “허 일병 총번 수정됐으며 살해 후 옮겨졌다”며 타살 주장. 국방부 반박.


▲6월 30일 = 의문사위, 허 일병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 불능’ 결정


▲7월 12일 = 의문사위 국방부 협박 사례 공개. 인 상사 즉각 사실 부인


▲7월 13일 = 인 상사, “의문사위 조사관들이 자신을 회유하려 했다”고 주장. 의문사위 즉각 부인. 조영길 국방장관 차관에게 총기발사 논란 조사 지시.

▲7월 14일 = 감사원, 총기발사 논란 특별감사 착수


▲7월 15일 = 육군, “의문사위 주장 사실 아닐 것”이라고 발표.    
    
 

2004년 7월 15일 오후 13시 6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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