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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시민의신문 기사

원폭희생자 손귀달 할머니의 못다 쓴 비망록 (2004.5.21)

by betulo 2007.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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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피해자 아픔과 상처 누가 씻어주나

2004/5/21

북핵을 둘러싼 북미갈등이 지금도 한반도 평화에 먹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만 누구도 한국인 원폭피해자에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내년이면 원폭투하 60주년이 되지만 2천명이 넘는 원폭피해 생존자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다. 모르쇠로 일관하기는 한국정부나 일본정부나 별 차이가 없다. 그나마 지난 96년 건립된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있을 뿐이다.

대구KYC 평화통일센터는 ‘피해자 중심으로 반핵평화를 이야기하자’는 취지로 올해부터 원폭피해자 구술증언 사업을 펼치고 있다. 지난 16일 세 번째로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을 찾은 대구KYC회원과 자원봉사자들은 1대1 결연을 통해 맺어진 원폭피해자들의 말벗이 돼주면서 그들의 증언을 기록했다. 대구KYC는 구술증언을 역사자료로 정리할 계획이다. <편집자주>


“기자들은 8월만 되면 우릴 찾고 다른 때는 코빼기도 안보이지. 그거 꼴보기 싫어서 일부러 아무 얘기 안해줘. 재작년 대선 기간엔 권양숙 여사가 한 번 찾아왔는데 그 후론 역시나 깜깜 무소식이더라구. ”


1945년 8월6일 아침 8시16분. 히로시마의 한 조선소에서 일하던 16살 소녀 앞에 섬광이 번쩍였다. 그리고 암흑. 갑자기 건물 유리가 다 깨지고 파편이 튀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파괴되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녀는 하늘 위로 올라가는 버섯 모양의 구름을 보았다. 그날 히로시마 상공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단란하고 건강하던 소녀 가족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든 재앙이었다.


한순간에 가족의 행복 앗아간 원폭투하


“아버지는 유리파편에 맞아 손가락 두개가 잘렸어. 그날부터 심하게 구토를 하시더니 다음날부턴 눈에 띄게 머리카락이 빠지더라구. 그 후 걷지도 못할 정도로 기운이 없어 자리보전하다 4년 후 돌아가셨지.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중풍에 걸려 왼쪽 몸을 전혀 못쓰게 되었고. 오른쪽 다리의 근육이 한뭉텅이 떨어져 나가는 중상을 입은 오빠는 몸이 나른하고 기운이 없어 일을 할 수가 없었지. 병원에 갔더니 폐가 안좋다고 하더라구.”


일본에서 태어나 미츠야마 시츠꼬(密山靜子)란 이름을 써야 했던 식민지 소녀 손귀달(왼쪽사진)은 이제 75세 할머니가 되었다. 손 할머니는 다행히 특별한 외상은 없었지만 몸이 나른하고 기운이 없기는 그도 마찬가지.


21살에 결혼했지만 건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하루는 아파서 누워 있는데 남편이 ‘왜 그렇게 자주 아프냐 무슨 병 있는거 아니냐’고 따지더라구. 남편 성화에 못이겨 ‘병이 있는건 아닌데 사실 히로시마에서 원폭을 맞았다’고 실토를 했지. 남편은 ‘야 무서운 년이다. 이런 년이랑 같이 못살겠다’ 하더니 집을 나가버리더라구.”


졸지에 홀어미 신세가 된 손 할머니는 딸이 심부전증과 심장 합심증을 앓아서 여러 차례 수술을 받는 등 마음 고생을 겪어야 했다. 그는 “딸 결혼시킬 때 내가 피폭자라는 걸 사돈집이 모르게 숨겼다”고 회상했다.


손진두, 7년 재판끝에 건강수첩 쟁취


손 할머니의 오빠인 손진두씨는 1970년 12월3일 일본으로 밀입국을 결행했다. 밀입국 직후 체포된 그는 일본 민간단체의 도움으로 일본정부를 상대로 후쿠오카현 지사에게 피폭자건강수첩 교부를 신청했다. 당시 수첩을 갖고 있는 일본인은 원폭의료법에 입각해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71년 시작한 재판은 결국 1978년 3월 최고재판소에서 결국 손씨의 승소를 인정하면서 끝났다. 이로써 한국인 원폭피해자도 일본에 건너가 수첩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다. 손씨는 그후 지금까지 일본 후쿠오카에 거주하고 있다.


그 후에도 피폭자의 투쟁은 계속됐다. 한국에 거주하는 피폭자에게도 의료혜택과 수당을 지급하라는 것이 주된 요구였다. 2002년 오사카고등재판소는 ‘피폭자는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피폭자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지금도 한국인피폭자가 수당지급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번은 일본을 방문해서 수첩을 받고 수당을 신청해야 한다. 건강이 나빠 일본에 갈 수 없는 수많은 한국인 피폭자들이 여전히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65년 한일협정도 피폭자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일본정부는 한일협정을 방패삼아 보상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전 손 할머니는 뇌졸증으로 쓰러졌다. 그의 어머니처럼 그도 이젠 왼쪽 팔다리를 못쓰게 된 것이다. 그는 “우리 정부에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폭피해 생존자 2천여명, 복지시설은 80명만 수용가능


“지난달에 수첩을 받으러 일본에 갔어. 내가 일본 현청 직원들한테 호통을 쳤지. ‘너희들이 우리 이렇게 아픈거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냐. 뭐 때문에 아픈 사람 오라가라 하느냐. 내가 일본 올 수 있는 사람인지 니들이 한번 봐라. 일본정부가 괘씸하다. 우리나라하고 미국이 싸웠느냐? 너희하고 미국 싸우다가 이리 된 거 아니냐. 너희놈들은 보상금 잘 받아먹고 있는데 왜 우리는 모른척 하느냐.’ 그 때 현청 밖에는 비가 많이 내렸어. 현청 직원들이 ‘하늘이 할머니 마음을 알고 눈물을 흘리네요’라며 위로하더라구. 내가 ‘야비한 개소리 그만하고 수첩이나 내놔라’라고 말했지.”


대구KYC 김동렬 사무처장은 “한달에 한번씩 복지회관을 찾지만 올 때마다 후손들이 제대로 못해 이분들한테 힘이 못되는 것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올해까지 구술증언을 기록으로 남겨 역사자료로 보존할 것”이라며 “장기적으로는 남북 원폭피해자간 교류와 반핵평화운동의 기초자료로 삼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제자들과 함께 복지회관을 찾은 정홍일 대구관광고등학교 교사는 “일본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봤는데 우리 할 일을 남에게 맡겨버린 것 같아 그들에게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며 “학생들과 함께 작은 실천을 통해 평화와 반핵을 깨우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적십자사가 2003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 생존해있는 한국인 피폭자는 2천1백14명이다. 북한에는 9백27명의 피폭자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을 위한 복지시설은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유일하다. 현재 복지시설에는 76명이 생활하고 있다.


2004년 5월 21일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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