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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이형모 나쁜넘"을 넘어 우리를 돌아보자

by betulo 2008.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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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신문은 어떻게 망했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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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도 질긴 ‘反이형모’ 정서

“그래도 XXX는 이형모에 맞서 싸우잖아”

이러저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어떤 노조원은 다른 어떤 노조원을 옹호하며 그렇게 말했다. 이 말은 사실 시민의신문 노조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반영했다. 

1999년에 발생했던 시민의신문 파업과 전원 퇴직 사태 이후 시민의신문 노조는 재결성 당시부터 일관되게 反이형모를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삼아왔다. 일부 예외는 있겠지만 사실 서로 서로 너무나도 생각이 달랐던 시민의신문 노조원들을 묶었던 거의 유일한 공통분모는 ‘反이형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민의신문 사태에서 보여준 노조의 ‘환원주의’를 비판했지만 사실 ‘反이형모’ 정서는 시민의신문에서 역사가 오래됐다. 1차적인 책임은 당사자가 져야 할 것이다. 그는 분명 독단적으로 시민의신문을 운영했고 시민의신문의 명분인 ‘시민단체 공동신문’과 실제 운영 사이에 괴리를 키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분명 지나쳤다고 인정해야 한다. 시민의신문에선 이형모에 반대하는 것이 시민의신문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형모를 공격하는 것이 시민의신문을 위하는 것인양 목소리를 높이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비판이 정당한 경우도 적지 않았고 이형모가 개인적인 지대추구를 한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고 반박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렇게 물어보자. 시민의신문 직원들은 과연 얼마나 정당했는가.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랑스럽다 말할 정도로 노력했는가.

막대한 광고수익 인센티브의 비밀

언젠가 직원 중 누군가 이형모 사장이 지나치게 많은 광고수익 인센티브를 가져간다고 비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일부에선 이형모 사장이 별로 하는 일도 없으면서 시민의신문에서 너무 많은 수당을 챙겨간다는 말도 했다.

내가 알기로도 그런 면이 존재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이형모는 그 부분에 대해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또다른 측면도 같이 짚어야 한다. 사장 재직 시절 이형모는 혼자서 시민의신문 광고 거의 대부분을 벌어왔다.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80%를 오르내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광고를 받아낸 사람이 일정정도 인센티브를 받아가는 게 일반적 관행임에 비춰보면 이형모의 수당이 많은건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 될 게 없었다.

당시 시민의신문 지면광고는 상당히 화려했다. 유한킴벌리라는 오랜 고정광고를 비롯해서 삼성, 현대차, SK 등 왠만한 대기업 광고는 여느 일간지보다도 많았다. 물론 일간지에 비해 단가는 낮았지만 일개 주간지에서 그정도 광고수익을 거둔 것은 평가해야 한다. 사실 그런 것에 기대 시민의신문은 2003년 무렵부터 흑자를 기록했다.

물론 그 흑자가 영업 실적을 조작한 것 때문에 나타난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일정정도 눈속임은 존재했다. 하지만 2003년 무렵부터 시작된 급격한 직원 임금인상은 눈속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2003년 2월 처음 입사했을 당시 내 급여는 100만원 안팎이었다. 지루한 임금협상을 거쳐 2004년 봄 무렵 20% 가까운 임금인상이 있었다. 급여가 한 순간에 150만원을 바라보게 됐다. 그 다음 노조 집행부에서 2005년 여름 즈음 임금을 타결지었을 때 또 10% 가까이 인상했다. 2006년 임협에선 기본급 일괄 10만원 인상으로 합의를 봤고 그 결과 8% 가량 임금이 올랐다. 결국 2006년에는 내 급여가 거의 170~180만원을 바라봤다. 만약 시민의신문 경영실적 개선이 순전히 눈속임이었다면 그렇게 가파르게 임금이 오른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경영 성적표까지 부정할 순 없다

내가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월급이 밀려서 회사를 떠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시민의신문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문제는 그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급여수준이 높아지는 것에 발맞춰 월말마다 경영진은 월급날을 맞추기 위해 고심하는 일이 월례행사였다. 물론 월급이 제 날짜에 안 나온 적은 내 기억으론 없지만 상여금은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직원들이 보여준 반응은 상당히 격렬했다. 사장이 직원들을 모아놓고 사정을 설명하고 나면 언제나처럼 공격과 비판이 이어졌고 경영진은 죄인 취급을 받았다. 오랜 ‘反이형모’ 정서에 비춰볼 때 그 때만큼 이형모를 공격하기 좋은 때도 달리 없었다. 심하게 말해 직원들은 “이형모 사장님 돈 벌어오십시오. (이 나쁜 넘아.)”라고 몰아세웠다.

나를 포함한 당시 시민의신문 직원들에게 스스로 물어본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노력했는가. 우리는 ‘기자’로서 얼마나 노력했을까. 우리는 ‘시민의신문’이라는 소중한 보금자리를 위해 과연 얼마나 최선을 다했나.

2006년 노사 임금협상을 할 당시 사측은 대대적인 구독확대 캠페인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측은 구독확대캠페인을 임금협상에 연계시키려고 했다. 협상 끝에 구독확대에 따라 연말 상여금을 증가시킨다는 내용을 잠정타결했다. 노조총회 분위기는 상당히 격렬했다. 대다수 노조원은 잠정타결에 반대했는데 그건 구독확대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작용했다. 일부 기자들은 “기자들이 영업직이냐. 왜 우리가 그런걸 해야 하느냐.”고 말할 정도였다.

당시 시민의신문처럼 조그만 조직에서, 구독확대는 매체 영향력도 키우고 기사에 대한 피드백 효과도 있으며, 무엇보다 다같이 회사를 키우는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결국 작자 자율적으로 구독확대 ‘목표치’를 결의하고 그걸 노조가 모아서 노사 공동선언 형식으로 발표하며 노조가 목표치 달성을 독려하는 걸로 대충 합의가 됐다. 물론 그 마저도 후임 노조 집행부를 구성하지 못해 유야무야 됐지만. 

그들이 노조를 떠난 서로 다른 이유

시민의신문 노조는 이형모라는 적이 있기에 존재하는 조직처럼 보였다. 문제는 시민의신문 노조원들의 지향점이 무엇이었나 하는 점이다. 직원에서 한 순간에 직장 내 사채업자로 돌변한 직원 3명 얘길 했지만 그 세명중 두 명은 누구보다 열심히 노조에 참여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노조 활동에 열심이었을까. 일차적으로 노조가 자신을 위한 안전막이었기 때문이다. 공익적 목적은 없었다. 자기들의 이익을 노조가 지켜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노조원으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하자 아무런 주저없이 노조를 탈퇴했다. 그들은 노조에 있으면서 누구보다도 이형모를 비판하는데 열을 올렸고 임금협상이나 사측과 대립하는 모든 사안에 대해 가장 강경한 주장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기자들은 어땠을까. 대체로 세가지 흐름이 있었다. 한 흐름은 노조는 이형모와 싸우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경영진과 필요 이상으로 대립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 흐름이 있었다. 그 중간에 중도파가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중도파는 논외로 하자.

노조를 재건한 2기 노조 집행부 이래 2기와 5기는 전자 흐름이었고 3,4,6기는 후자였다. 그리고 시민의신문 사태가 발생하고 새롭게 구성된 6기는 후자의 흐름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줬다.

위기상황이었기에 노조 집행부의 활동은 당연히 격렬해졌고 거기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점차 절반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입을 닫아갔다. 대외적인 언론통로는 노조 집행부가 독점하고 있었기에 외부에서 공식적으로 듣는 발언들은 강경한 ‘反이형모’ 일색이었다.

우리는 게으른 기자였다

지금 와 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다른 건 몰라도 한가지는 분명하게 해야겠다. 우리는 분명 게으른 기자들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고 흉보던 이형모가 주는 떡고물에 취해 적당히 월급 받아가면서 적당히 일하며 술안주로 이형모를 올려놓았을 뿐이다.

우리는 치열하지 못했다. 시민의신문이 성격상 시민단체와 언론사 성격이 겹쳐 있기 때문에 시민의신문 기자들도 두가지 성격을 어느 정도 공유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단점만 도드라졌다. 기자로서도 치열하지 못했고 시민운동가로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자로서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2003년까지만 해도 시민단체에서 나오는 보도자료나 기자회견을 취재해서 그걸로 스트레이트 기사 쓰는게 거의 전부였다. 2004년 들어 편집국장이 바뀌고 기획기사를 강조해서 성과도 올렸지만 예전 관성은 일부에서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기자가 대접받는 문화도 없었다. 처음에 열심히 하던 기자들도 나중에는 지치고 짜증나서 ‘하향평준화’하려는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다. 기자들 사이에 기사방향이나 취재기획 등 ‘기사’와 관련해서 격렬한 토론을 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논쟁은 언제나 팀장 직제를 둘 것인가 말 것인가, 팀장은 누가 할 것인가, 온라인과 지면의 취재 영역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 그것도 토론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런 토론이 거의 전부였다.

서로 그냥 자기 일 하면서 마음 맞는 기자들끼리만 어울렸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굳어져 버렸다. 할 말은 많지만 그 부분은 굳이 하지 않을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성찰’

이형모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사실 길가다 얼굴 마주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얼마나 떳떳하게, 치열하게 살았나. 그 얘길 하고 싶었다. 제일 먼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누구를 욕하기는 쉽다. 길가다 소나기를 만나서 “이게 다 노무현 때문(혹은 박정희 때문, 빨갱이 때문, 미국 때문)”이라고 하면 잠깐 기분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시민의신문 사태가 발생한지 1년 반이 됐다. 이제는 말해보자. 우리에게 필요한건 이형모 비판이 아니라 ‘성찰’이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 그건 시민의신문 직원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표리부동했던 시민단체 명망가들, 먼 산 바라보듯 했던 시민단체들, 연대라는 이름으로 장님 코끼리 만지면서 애꿎은 사람들에게 상처나 주는 일부 시민운동가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시민운동의 한 시대는 시민의신문 사태를 통해 끝났다. 아직 새 시대는 오지 않았다. 열쇠는 ‘성찰’에 있다.

<뱀다리[蛇足]>

시민의신문과 시사저널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을 좀 더 솔직하게 부연설명해보자. 시민의신문 구성원들과 시사저널 구성원들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혹은 시민의신문 기자들과 시사저널 기자들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이 긴 글을 쓰려고 한 것은 그 질문에 나름대로 답을 찾아보고 싶어서였다. 시민의신문은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무엇을 놓쳤던 것일까. 그런 질문을 통해 ‘역사적 맥락’에서 실패를 되돌아보고 지금 내 자신을 반성해보고 싶었다. 이 글을 꼼꼼히 읽고 나를 아는 분이라면 내가 요새 고민하는 주제가 “시사저널과 서울신문의 차이는 무엇일까.”라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시사저널 기자 중에 잠깐이라도 직접 얘길 해본 사람은 두 명에 불과하다. 고로 나는 시사저널 구성원들에 대해 문외한이다. 언론에 비친 모습과 시사저널 기사를 통해 접한 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언젠가 시사IN 분들과 소주 여러 잔 하며 얘기를 찬찬히 들어보면 그때는 비교가 가능해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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