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났던, 그 모든 순간들 11>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인 정원호와 진재수를 각각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에 임명했다.
조선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에서 이런 보도가 나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다. 온갖 욕이 난무할 것이고 일부는 김정은 규탄집회도 열 것이다. 사실 평양에서 서울시장을 임명하는 건 누가 봐도 말이 안된다. 그건 서울에서 평양시장을 임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게 상식이다. 하지만 현실은 자주 상식을 배반한다.
행정안전부 산하에는 이북5도위원회라는 정식 정부조직이 있다. 평안남북도와 함경남북도, 황해도 등 도지사 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이고 이를 보좌하는 사무처가 이북5도청이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번듯한 청사 건물까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60년 넘게 평안남도 도지사를 비롯한 이북5도 도지사를 임명하고 차관급에 해당하는 급여와 예우까지 해준다. 이 모든 게 완벽한 합법이다. 나는 지금도 유엔주재북한대사가 유엔 총회에서 "한국이 우리 공화국을 침공해 점령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며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함경북도 도지사 임명장을 탈북자 출신인 지성호 전 국회의원에게 주는 사진을 제시하면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이런 말도 안되는 사태를 비판하기 위해 12년 전에 쓴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북한 관영방송인 조선중앙방송은 오늘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박완순·김만수·안휘정 당 중앙위원을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충남도지사에 각각 임명했다고 보도했다... 방송은 ‘이남9도에 대한 국토관념을 명확히 하고 언젠가는 기필코 달성하고야 말 실지회복에 대한 통일 의지를 표명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몇가지 재미있는 현상이 눈에 띄었다. 하나는, 이북5도위원회에 대한 공론화가 조금씩이나마 이뤄지고 있다. 이북5도위원회에 대한 장문의 기획기사를 쓴 (현재까진) 유일한 기자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다른 하나는 좀 어이없는데, 박완순이니 안휘정이니 하는 애기가 완벽한 허구이자 풍자라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한데도 ‘북한에서도 서울시장이나 충남도지사를 임명하고 있다, 그런 보도도 있다’는 식으로 ‘남북이 다 똑같다’고 물타기를 하는 글이 여럿 보인다. 아마도 누군가 첫 문단만 대충 읽고 대충 옮긴 기사를 누군가 대충 보고 또 대충 옮기면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싶다. 뭐, 이게 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북한산 가는 길, 머리에 번쩍
한참을 미로에 빠져 헤매다가 혹은 미로에 빠졌다는 것조차 모른 채 있다가 어느 순간 번뜩 하며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머리에 꽂힐 때가 있다. 나한테는 이북5도위원회가 그랬다. 2004년 연말 즈음해서 직원들 다함께 북한산에 오르는 행사가 있었다. 어찌어찌 다른 일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합류했는데 마침 약속장소가 구기계곡이었다. 예쁘게 생긴 단독주택을 구경하며 구기동을 혼자서 슬슬 걸어 올라가다가 낯선 큰 건물에 시선이 꽂혔다. 간판에 이북5도위원회라고 써 있었다.
그해 가을부터 탈북자 문제를 비롯한 북한인권이라는 주제를 한창 취재하고 있었는데, 김귀옥(한성대 사회학과 교수)이라는 학자가 국회 국정감사에 전문가 증인으로 출석해 답변한 게 핵심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자연스럽게 그가 쓴 <이산가족, ‘반공전사’도 ‘빨갱이’도 아닌>(역사비평사, 2004)과 <월남민의 생활 경험과 정체성>(서울대학교출판부, 1999)을 읽게 됐다. 그 책에 이북5도위원회가 어떤 곳인지 언급이 있었다. 사실 그 전까진 이북5도위원회라는 곳이 있는지도 몰랐고, 책을 읽을때도 ‘뭐 이런 곳도 있구’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큼지막하게 생긴 이북5도위원회 간판이 나에게 날아와 내 머리를 때려 버렸다. 곧바로 김귀옥 교수를 찾아가서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는 무척이나 즐거웠다. 연구실에서 꽤 길게 이야기를 나눴는데 시간가는 줄 몰랐다. 많이 배웠고 또 많이 느꼈다. 그의 핵심 주장은 “이북5도위원회는 존재 자체가 모순”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겠다. “정부가 흡수통일을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고, 흡수통일을 해서도 안되는 상황에서 북한 점령통치를 가정하는 ‘망명정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북5도위원회를 민간단체로 바꾸는 게 좋겠다.”
이북5도위원회 동화연구소 소장으로 오래 재직하다 정년퇴직한 이경남이라는 분을 소개받았던 건 그 인터뷰를 통해 거둔 또다른 소득이었다(그가 들려준 이야기 간략 요약과 이북5도-역대 정부 거래에 대한 기사).
당시 이경남은 “이북5도지사가 있어서 나쁠 건 뭐 있느냐”며 “이북도민들의 생활 편의도 봐주고 하면 좋은 것 아니냐”고 말했다. 글쎄 과연 그럴까. 일단 한국 정부가 북한을 ‘미수복’ 지역으로 전제하고 그 나라의 도지사를 임명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될 수가 없다. 더구나 차관급이라니. 연봉 1억 4500만원에 업무추진비 1500만원, 운전기사와 비서까지 지급한다. 물론 하는 일이 있을리가 없다. 거기다 100명 가까운 명예 시장과 군수, 900명이 넘는 읍면동장까지 정부가 임명장을 수여한다. 아무리 명예직이라고 하지만 시장·군수에게는 매월 37만원, 명예 읍·면·동장에게는 매월 14만원씩 수당도 준다(이에 대한 최근기사).
2014년 당시 취재했던 박모씨 사례를 보자.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산다. 부모는 평안북도 출신이다. 그는 당연히 휴전선 북쪽으론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정부가 임명한 평안북도 삭주군 명예 군수(임기 3년)였다. 물론 수당도 받는다. 하는 일은, 두 달에 한 번씩 도지사가 주재하는 시장·군수 모임에 참석하고 매년 어린이날 열리는 도민체육대회와 10월에 열리는 이북5도민중앙연합회 체육대회 준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밖에 청년프로그램이나 해외연수, 기업체 견학 등이 있는 정도다.
월남민 대부분은 이제 70대 이상이다. 이북5도지사와 군수, 면장, 동장을 할 사람이 부족해지니 자녀, 최근엔 자녀의 배우자까지 임명 자격을 준다. 이러다 손주들까지 자격조건을 확대할 것 같은데, 그럼 나처럼 본관이 황해도 신천인 사람이라고 못 할 이유가 없겠다. 이북5도위원회를 구성하는 차관급 도지사부터 시장, 군수, 면장 등 모든 직책의 자격조건이란 ‘혈통’과 ‘혼인’ 밖에 없는건데, 이런 세습(世襲)을 인정해줄 국민이 몇 명이나 있을지 의문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제2항은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고 돼 있다.
이제는 없애줘야 할 곳
이북5도위원회의 설립취지도 황당하지만, 더 황당한 건 이북5도위원회라는 곳이 차관급과 명예직들 돈 주는 것 말고 실제 하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북한 관련 정보수집이나 정책연구는 취재해보니 관련 예산조차 제대로 책정돼 있지 않고, 그나마 있는 사업이 북한이탈주민지원사업, 이북5도민체육대회와 민간단체인 이북5도민연합회 지원사업 정도다. 나머지는 그냥 도지사 등 명예직들과 공무원들 인건비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직 운영을 위한 조직운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면 그냥 정부 효율성 차원에서라도 없애는 게 맞다. 이북5도위원회는 해체하는 게 남북관계 개선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북5도위원회는 존재 이유를 잃었다. 존재해야 할 이유를 잊어버렸다. 그저 존재하니까 존재한다. 존재 이유를 잊은 채 존재하는 존재. 영화나 드라마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좀비가 딱 그런 존재다. 이북5도위원회가 좀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북5도위원회는 해가 지면 퇴근하는데 좀비는 해가 지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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