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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어깨 위에서, 선을 넘어 생각하기

<처음 만났던, 그 모든 순간들>

by betulo 2026. 2. 2.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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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던, 그 모든 순간들 010>


김정은과 트럼프가 서로 핵무기 발사 단추 누르겠다며 험악하게 으르렁거렸다. 2017년은 북핵문제로 한반도에 당장이라도 전쟁이 나는 것 아니냐는 뉴스가 연일 신문과 방송을 뒤덮던 시절이었다. 그런 마당에 남북대화를 강조하고, “북한은 붕괴하지도 않고 붕괴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 책이라니.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는 소리 듣기 딱 좋은 책이었다. 책 나오자마자 규탄집회가 집 앞에서 열리고 돌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공동저자인 박한식 교수가 아이디어를 냈다.

강박사는 혹시라도 보수세력한테서 비난을 받으면 ‘이게 다 박한식 교수가 한 말을 인용한 것 뿐’이라고 말해라. 나도 평양에 있는 지인들이 불만을 제기하면 ‘이게 다 강박사가 내가 한 말인양 자기가 쓴 것일 뿐’이라고 말하겠다.

나이 차이가 얼추 두 배는 되는 두 저자는 그렇게 서로 알리바이를 만들어주자며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당시엔 정말 심각했다.) 이래저래 책 출간도 늦어졌다. 원래 계획은 2017년 하반기였는데 해를 넘겼다. 어쨌든 2월에는 출간하기로 했다. 그러다 후반 작업을 하느라 조금 더 늦어져서 4월 중순이 디데이가 됐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책이 정식 출간되고 보름도 안되어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고, 문재인과 김정은이 나란히 판문점이라고 그어져 있는 '선'을 보란듯이 넘어 버렸다. 하필이면 우리 책 제목이 ‘선을 넘어 생각한다’였으니 대박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렇게 2018년 4월에 ‘선을 넘어 생각한다’(부키)를 세상에 내놨다. 부제목이 ‘남과 북을 갈라놓는 12가지 편견에 관하여’였다. 북한붕괴론, 선군정치, 북한인권정치, 대북퍼주기론, 북중관계, 한반도 비핵화, 안보 접근법과 평화 접근법 등을 두루 다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라면 공동저자인 박한식 교수가 했던 “통일이란 동질성을 회복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통일이 전 세계 인류 공동체에 미래를 위한 희망을 제시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를 꼽겠다. 그리고 내 표현인 “북한에 대해 우리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단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는 북한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도 함께 거론하고 싶다. “신뢰라는 것은 대화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대화의 결과”라는 말도 많이 와닿았는데 이 문장은 JTBC 뉴스룸에서 앵커 손석희가 클로징멘트로 인용해준 덕분에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나이 차이 두 배, 거인을 만나다

세상 참 좁다. 그걸 사회학에서 그럴 듯 하게 표현한 게 ‘6단계 법칙’이라는 이론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두세 단계를 거치면 다 연결돼 있고, 아무리 멀어봐야 여섯 단계면 인연이 이어지게 돼 있다. 내가 세계적인 북한 전문가였던 박한식 교수와 연결된 것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지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S형은 술자리에서 석사 논문 지도교수 얘기를 자주 했는데 그 지도교수가 박한식이었다. 2015년 12월에 애틀랜타 출장을 가게 됐는데 출장 주제와 별도로 그 교수와 인터뷰를 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무작정 이메일을 보냈다. S형한테 소개받았다며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답장이 왔다.

S가 누구인가요? 모르는 사람인데요.

교수님 제자인데요.

글쎄요 기억이 안나는데. 

뭐 아무렴 어떠랴. 일단 연결됐다는 게 중요하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재차 요청을 했고 수락을 받았다. 인터뷰 시간과 장소도 정하고 질문지도 보냈다. 조지아대학교는 애틀랜타에서 차로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 곳이었다. 왜 조지아대학교가 애틀랜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래도 인터뷰는 충분히 재미있었다. 왕복 세 시간을 썼고 인터뷰도 세 시간 가량 걸렸다. 박한식 교수는 경상도 억양이 여전히 남아 있는 말투로 또박또박 한반도 평화정착과 남북통일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특히 평화가 안보에 종속되면 안된다고 강조했던 게 오래 기억이 남았다. (당시 인터뷰는 여기를 참조)

당시 그가 강조했던 핵심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 현실은 현실대로 인정해야 한다. 평화정책이 안보정책에 종속되면 안된다. 평화는 지배가 아니라 조화다. 지배하려고 하면 분쟁과 갈등이 생긴다. 지배를 통해 평화를 이룬다는 건 불가능한 목표다. 통일을 하지 않더라도 갈등과 대립없이 ‘이웃’으로서 각자 잘 살면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인터뷰 말미에 그는 같이 책을 써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책을 쓰고 싶은데 미국에서 50년 넘게 살았기 때문에 한국어로 글을 안 쓴지 너무 오래됐다며 함께 작업을 해보자고 했다. 자신의 인생 역정과 남북관계와 평화문제에 대한 생각을 밝히는 책을 쓰고 싶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의기투합이 됐다.

한국으로 귀국하고 나서 이메일을 보냈다. 구체적인 인터뷰 일정과 향후 계획을 의논해야 했다. 답신이 없었다. 몇 차례 이메일을 더 보냈지만 역시나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냥 공치사였던 건가. 솔직히 썩 유쾌하진 않았다. 아무리 공치사라도 인터뷰 끝나자마자 이렇게 입을 씻는 건 좀 무례한 것 아닌가. 그렇게 잊어버리고 살았다.

1년 뒤 국제전화가 왔다. 1년 만에 무슨 전화인가 싶었다. 첫 마디가 놀라웠다. 인터뷰 직후 심장수술을 했고 이제야 회복이 됐다고 했다. 박한식 교수는 1년 가까이 병원 신세를 지느라 나한테 연락할 여력이 안됐다며, 이제 건강을 회복했는데 책을 같이 쓰자는 약속이 지금도 유효한지 물었다. 당연히, 못 먹어도 GO.

아이폰이 이럴 때 참 좋다. 아이폰끼리는 국제전화를, 그것도 영상통화를 해도 무료라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한국과 미국 시차를 고려해 일주일에 세 차례씩, 아침 6시쯤부터 한 시간 가량씩 전화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를 50번 가량 했다.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면서 그걸 바탕으로 책을 어떻게 구성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출판사도 알아봐야 했다. 한 곳은 계약 직전에 깨졌고 몇 군데는 퇴짜를 맞았다. 대표와 안면이 있었던 부키 출판사와 계약이 됐다.

원고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처음엔 회고록이었지만 곧 둘이 함께 남북관계를 다루는 쪽으로 바꿨다. 자연스럽게 내가 쓸 분량도 늘어났다. 원고를 넘기고 나서 출판사에선 대담 혹은 인터뷰 형식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표현도 존댓말로 바꿔서 대중성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하자고 했다. 그 작업을 위해 두세달 더 걸렸다. 제목을 두고도 옥신각신이 있었는데 결국 '선을 넘어 생각한다'로 정해졌다. 결과적으로, 이게 신의 한 수가 됐다.(책 출간 이후 뒷이야기를 다룬 인터뷰를 참조)

그는 평소 외국인들에게 한민족의 특징을 설명할 때 ‘경험이 많은 민족’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어른들 가운데 어지간한 대하소설 분량 안 나올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박한식 교수는 그 중에서도 파란만장했다. 그는 1939년생이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푸위현(扶餘縣) 산차허(三岔河)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지독한 가난과 배고픔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내다 해방이 된 뒤 평양을 거쳐 할아버지 고향인 경북 청도로 돌아왔다. 국공내전도 목격하고 한국전쟁에선 미군 폭격으로 죽다 살아난 적도 있었다. 어렵게 대학에 가선 2학년 때 4.19를 겪었다.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가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가면서 공부한 끝에 6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조지아대학교 교수가 됐다.

세상 참 좁다. 그가 가르친 제자 가운데 예비역 해군 장교가 있었는데 그 장교는 해군사관학교 시절 지미 카터와 룸메이트였다. 그렇게 조지아 주지사 카터와 인연을 맺었고, 카터가 대통령이 된 뒤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과 만났다. 덩샤오핑의 소개로 하얼빈에 살던 고모를 방문했고, 또 황장엽과 연결돼 평양을 방문하게 됐다. 그렇게 박한식 교수와 평양의 수십년 인연이 시작됐다. 1980년대 말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북핵문제 와중에 북미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그 인연으로 카터의 평양방문을 주선하게 됐다. 평생 북한을 방문한 게 50번이 넘었다. 1996년에는 애틀랜타 올림픽에 북한 선수단이 참가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았고, 2009년에는 당시 북한에 억류돼 있던 미국 기자 두 명의 석방을 위해 빌 클린턴(전 미국 대통령) 방북을 주선했다. 그렇게 수십년에 걸친 경험과 고민을 책에 담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다가 박한식 교수가 1월 20일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게 됐다. 틈틈이 이메일과 전화로 안부를 묻곤 했는데 근래 연락이 잘 되지 않아 걱정이 됐는데 이렇게 황망히 세상을 떠났다. 좀 더 자주 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후회스럽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자상하게 웃는 모습이다. 생각해보면 항상 그렇게 웃는 낯으로 나를 대하던 그 모습 그대로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눈물이 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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