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공’들이 안 움직이고 눈치만 본다는 얘기를 ‘어공’한테서 처음 들은 게 2023년 초였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하고 반년 남짓 지났는데 복지부동이라니. 물론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전임 정부에서 뭔가 열심히 한다고 했던 사안은 죄다 감사받고 수사받고 압수수색받는다. 5년 뒤에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남북경협이라도 나섰다간 수사 받기 십상이다. 지역경제발전을 위해 기업투자 유치에 노력하면 배임이니 직권남용이니 시달린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친환경에너지를 확대를 추진하면 좌파정부 부역자 소리 듣기 딱 좋다.
현재 탈탈원전을 추진하는 정부부처 담당 부서는 얼마 전깍지 탈원전 업무 담당 부서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탈원전과 탈탈원전은 '원전' 담당 부서에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다음 정부에서 탈탈탈원전을 한다며 탈탈원전을 탈탈 턴다고 해보자. 탈탈 털리는 사람과 탈탈 터는 사람이 모두 같은 부서 같은 사람들이다. 결국 공무원으로선 탈탈탈원전 시대를 대비해 탈탈원전에 진심을 담으면 안된다.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복지부동만이 살 길이다. 압수수색 당하고 감사 받기 싫으면 적극적으로 일하면 안된다. 대통령실 정무수석이 했다는 말을 약간 비틀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복지부동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게 이 정부 핵심가치다. 복지부동을 강요하는 정부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모이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나는데, 검사들이 특수활동비를 맛집활동비로 착각하는 걸 보면 그닥 청렴한 것 같지도 않다. 그냥 물 밖에서 물이 더럽다며 물을 헤집고 물고기를 괴롭힐 뿐이다. 그래서 이번 정부에서 적극행정을 하는 건 ‘3사’ 뿐이다. 검사, 감사, 용궁 사진사.
대통령실로 파견돼 일하는 늘공들이 너도나도 복귀하고 싶어하는 반면 후임자를 찾지 못해 애를 먹는다는 얘길 들은 건 2023년 말이었다. 그럴만도 하다. 2022년부터 죽어라고 일했는데 지금껏 승진한 사람이 없단다. 처음엔 뭔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다가 이제는 진실을 알아버렸다고 한다. ‘우리는 그냥 열심히 일만 해야 하는 존재구나.’ 하긴, 노비가 일 열심히 했다고 승진했다는 얘기는 여태 들어본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공무원들 가운데 가장 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대통령실이다. 대개 승진을 앞두고 있고, 승진할 가능성이 높은, 일 잘하고 일 잘할 준비도 돼 있는 공무원들이 대통령실로 파견된다. 1년 가량 죽어라 일하면 승진해서 친정으로 금의환향하는 게 일반적인 양상이다. 그게 이번 정부에선 깨졌다. 복지부동의 거대한 그림자가 대통령실도 덮고 있다. 조만간 대통령실이 구인난에 시달리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 같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뭔가 강력한 정책을 내놓고 얼마 뒤 “엄청 강력한 대책”이 나오고 또 얼마 지나면 “진짜 겁나게 강력한 대책”이 나온다. 그리고 잊을 만 하면 도돌이표다. 마약이 그랬고 저출산이 그랬다. 킬러문항이 그랬고 이태원이 그랬다. 이념을 바로 세우는 것과 이권카르텔척결에 엑스포까지, 어느 것 하나 차분하게 준비해서 나온 게 없고 “강력대응”이니 “원점재검토”니 하는 말이 따라붙지만 마무리가 제대로 된 것도 없다. 남은 건 그냥 혼란과 갈등, 어퍼컷과 떡볶이 뿐이다.
중국에서 이런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인데, 딱 그렇다. 미국 예를 들면 트루먼이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크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던 아이젠하워가 당선된 뒤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명령하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불쌍한 아이크.”
결국 하던 버릇대로, 익숙하고 쉬운 것만 하게 된다. 전국 교정시설(교도소와 구치소) 수용자는 지난해 10월 기준 5만 8945명이었다. 정원이 4만 9918명이니까, 정원 대비 118%다. 2016년(121.2%) 이후 최고치라고 한다. 정원 대비 수용률이 꾸준히 감소해 2022년 104.3%까지 줄었다는데 1년만에 말 그대로 폭증했다. 공자님 말씀을 빌리면, 가혹한 정치는 호환마마보다 무섭다. ‘나쁜 놈 잡아 가두기’라는 전공을 살리는 것 같긴 한데, 그런다고 나라꼴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정작 '미치도록 잡고 싶다'며 진짜 미친듯이 압수수색했던 '피의자'는 왜 여태 증거 하나 없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와중에 선거가 다가오니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념이라며 '정신력'에 집중할 때는 언제고 각종 선심성 정책이 난무한다. 재정건전성을 위해 긴축을 한다면서 다주택자와 대기업을 위한 각종 세제지원을 내놓는다. 재정건전성이 중요하다면서 각종 감세에 여념이 없다. 둘 중 하나다. 애초에 재정건전성에 관심이 없거나, 재정건전성이 뭔지 모르거나. 아마 둘 다 정답일 듯 하다. 재정건전성은 복지정책 반대할 때나 필요한 논리고, 애초에 국가재정과 집안살림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를 못하니까 나라빚에 바들바들 떤다. 그러면서도 다음주엔 또 어떤 대기업과 다주택자 세제혜택이 나올까 싶다.
정부에선 ‘감세’를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세금을 많이 거두는 건 가렴주구이자 ‘반서민 정책’이란다. 하지만 말입니다. 세금을 적게 거두는 건 국민에게 그만큼 책임지기 싫기 때문이다. 독재국가일수록 조세수준이 낮고 민주국가일수록 조세수준이 높은 건 다 이유가 있다.
북한은 ‘세금없는 지상낙원’을 자랑으로 여기고 스웨덴 같은 나라는 평균적으로 월급 절반을 소득세로 원천징수한다. 스웨덴은 복지국가이기 때문에 세금을 더 많이 거두는 게 아니라 세금을 더 많이 거뒀기 때문에 복지국가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얼핏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명백한 진실을 말하자면 이렇다. 세금을 더 많이 거두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부자만 세금 왕창 내는 것도 아니다. 스웨덴은 부가가치세율이 25%나 된다(한국은 10%다). 그럼 현재 한국정부는? 후진국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혹은 남북격차를 줄여 통일기반을 구축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출산파업과 인구감소, 고령화, 수도권 양극화와 지방소멸, 남북관계, 심지어 이념을 바로 세우는 문제까지도 ‘지당하신 말씀’과 ‘강력한 대책’ 그리고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떡볶이 먹방’ 뒤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이 하루 하루가 흘러간다. V2 표현을 빌어 글을 마무리한다. “대통령 임기 5년이 뭐가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어요.”
인권연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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