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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사해/여행기

이토록 즐거운 수천년 전 사람들 일기장 훔쳐 보기

by 자작나무숲 2022. 8. 4.

키르기스스탄 여행기(6) 카라콜에서 비슈케크, 450km

진정한 강행군이다. 카라콜을 떠나 이식쿨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 비슈케크까지 가야 한다. 중간에 촐폰아타와 부라나 탑도 들러야 하는데 대략 450km 거리를 달리는 셈이다. 더구나 아침엔 알틴아라샨을 트래킹으로 혹은 트럭킹으로 내려와 점심까지 먹고 출발해야 하니 밤늦게 비슈케크에 도착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부라나 탑은 원래는 여행 첫 날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이스타나 항공 덕분(너를 잊지 않고 있다)에 맨 마지막 방문지가 되면서 23일 일정이 더 꼬였다.


점심을 먹고 카라콜 시내를 건너뛰고 곧바로 출발했다. 중간 중간 이식쿨이 보인다. 피서객이 몰린 덕분에 중간 중간 교통정체도 겪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머릿속엔 카라콜의 역사가 요동쳤다.


카라콜은 한(漢) 무제(武帝, 재위: 기원전 156~87년) 명을 받고 서역 탐험에 나섰던 장건(張騫)이 찾아갔던 오손[烏孫]의 본거지 적곡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오손은 기원전 2세기경 천산산맥 서쪽과 동쪽을 장악하고 흉노를 상대로 중개무역을 했다.


진시황(秦始皇, 재위: 기원전 259~210)이 죽은 뒤 벌어진 혼란을 끝낸 중원제국 한(漢)은 비슷한 시기 북쪽에서 급격히 세력을 확장한 중앙유라시아 제국 흉노[匈奴] 때문에 골치를 썪이고 있었다. 한 고조(高祖, 재위: 기원전 247년~195년)는 흉노와 정면으로 맞섰다가 현재 산시성에 있는 백등산(白登山)에 포위된 끝에 뇌물을 주고서야 겨우 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거기다 화친 조건으로 형제 관계를 맺고 ‘형님’께 해마다 막대한 비단 등 물자를 선물하고 공주를 시집보내야 했다.


당시 한나라에선 ‘오랑캐들이 좋은 비단옷을 입고 한나라 공주가 낳은 아들이 후계자가 되면 저 흉한 놈들이 언젠간 순한 것들이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없지 않았지만 그건 그냥 정신승리에 불과했다. 흉노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국을 압박해 얻어낸 비단을 서쪽에 있는 이란이나 로마까지 유통시킴으써 막대한 부를 쌓았다. 물론 한나라에선 그 거대한 유라시아 경제권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한무제(漢武帝)는 흉노를 물리치고 싶어했다.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그가 주목한 게 흉노에 패해 서쪽으로 도망가 이를 갈고 있다는 월지(月支 혹은 月氏)였다. 한-월지 동맹으로 남쪽과 서쪽에서 흉노를 협공한다는 구상을 위한 임무를 띄고 장건이 기원전 139년 100명이 넘는 일행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바로 흉노에 붙잡혔다.


흉노는 장건을 10년 넘게 억류했는데, 그를 포섭하려고 했는지 새장가까지 보내줬다. 그럼에도 장건은 아내와 일부 부하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고, 임무를 위해 서쪽으로 계속 전진했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존재조차 제대로 몰랐던 거사국(車師國,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투르판과 짐사르 사이에 위치)과 구자국(龜玆國,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쿠처)을 거쳐 현재 대완국(大宛國,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을 넘어 강거(康居,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를 거쳐 비로소 아무다리아를 건너 월지까지 갔다. 물론 이미 새 터전을 잡고 잘 먹고 잘 사는 월지는 굳이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월지에 이르렀지만 군사동맹 체결에 실패한 장건은 귀국길에 올랐다. 그리고 흉노에 또 붙잡혔다. 이런 정황을 보면 현재 신장위구르자치구와 중앙아시아 일대가 온전히 흉노 통제권에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장건은 이번엔 흉노에서 발생한 내분을 틈타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이 ‘의지의 중국인’은 마침내 기원전 126년 장안(長安)으로 귀환했다. 13년에 걸친 탐험이었다.


장건은 기원전 119년 세번째 서역 탐험에 나섰다. 이번엔 오손과 군사동맹을 맺는 임무였다. 물론 이번에도 군사동맹 체결은 실패했다. 오손으로선 흉노와 전쟁한다는 건 너무 위험했다. 그럼에도 장건 덕분에 중국은 흉노 서쪽을 제대로 인식하게 됐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비단길(실크로드) 하면 중국을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비단길을 개척하고 국가발전에 활용한 건 흉노가 먼저였다. 흉노 이전엔 스키타이가 있었고, 중앙유라시아를 핵심으로 한 거대 경제권을 극한까지 끌어 올린건 유라시아 동서 교역로를 육상과 해상으로 연결한 쿠빌라이 카간이었다.


흉노는 중앙유라시아를 무대로 중국부터 로마까지 시야에 두었고, 유목문화를 바탕으로 한 기동력과 기마군단과 활을 활용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오아시스 도시국가와 전략적 제휴관계를 통한 국제교역으로 제국을 확대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제 흉노가 독점하던 실크로드에 중국이 신흥주자로 경쟁 대열에 본격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다. 장건이 방문한 오손은 그 시작을 위한 화룡점정 가운데 하나였다.


보물에 낙서하는 인간에게 저주 있으라

이식쿨 북쪽에 있는 촐폰아타(Чолпон-Ата)에는 거대한 암각화 공원이 있다. 공원 끝까지 갔다 오는데만 30분 이상이 걸릴 것 같은 넓은 공원에 고대인들이 남겨놓은 다양한 암각화가 지천이다. 아쉬운 건 공원 앞쪽에는 암각화마다 안내판이 있어서 암각화 모양을 표시도 해놓았는데 좀 더 위쪽으로 가면 돌무더기만 잔뜩 보일 뿐 어디에 암각화가 있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다. 그래도 그 또한 좋았다.


햇볕을 막는다고 수건에 물을 적셔 모자처럼 머리에 쓴 채 뙤약볕에서 한 시간 가까이 혼자 싸돌아 다녔다. 수천년 전 이 땅에서 살았던 이들이 그려놓은 사슴과 양, 말, 소, 그리고 사냥하는 모습이 바위에 또렷이 각인돼 있었다. 그만 출발하자는 소리를 듣고서야 마지못해 버스에 올라탔다. 마음 같아선 서너시간은 둘러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다.


일찌감치 버스에 앉아 있던 박 작가가 땡볕에 혼자 신난 게 신기했는지 나에게 물었다.


어떤 점이 좋았나요.


수천년 전 옛날 사람들이 어딘가 감춰둔 일기장을 엿보는 재미가 있잖아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시선에서 한 번 보고, 지금 우리 관점에서 다시 보고, 제3자 시각에서 새로 접근하는 사고실험같은 것, 그게 역사가 재미있는 이유 아닐까요. 얘기해 놓고 보니 어딘가 샘이 있어 사막이 아름답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했던 어린 왕자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비슈케크에서 동쪽으로 한시간 남짓 걸리는 곳, 토크모크(Токмок)에서 7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부라나(Бурана)에는 거대한 탑 하나가 평원에 서 있다. 9세기 성립한 카라한 왕조에서 세운 탑이라고 한다. 부라나라는 명칭은 미나레트를 뜻하는 투르크어 ‘무라나’에서 파생됐다고 한다.


원래는 높이가 45m나 됐는데 15세기에 발생한 지진으로 기단부만 남아 지금은 25m로 줄었고 한쪽으로 약간 기울었다. 기단부 직경은 9.3m, 꼭대기 직경은 6m다(장준희, 2012: 328~329). 팔각형으로 기초를 다진 뒤 원뿔 모양으로 탑을 세웠고 외벽은 벽돌로 돼 있다. 탑 꼭대기에 오르려면 외곽에 설치한 철제 계단을 통해야 한다. 탑 내부 계단은 너무 가팔라서 똑바로 서서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탑만 홀로 덩그러니 서 있을 줄 알았는데 탑 주변으로 옛 성벽 유적이 함께 있었다. 부라나 탑은 발굴조사 결과 직사각형 모양 성곽도시 안에 자리잡고 있었고, 탑 주변으로 요새와 종교시설, 목욕탕, 상수도관 같은 유물을 발굴했다고 한다(장준희, 2012: 328). 부라나 탑 바로 옆에는 직경 100m, 높이 10m에 이르는 언덕이 있는데 학자에 따라 왕궁 혹은 종교시설로 추정한다고 한다. 하지만 내 눈길은 그 언덕 옆에 늘어선 석인상, 이곳 말로 발발에 꽂혔다. 투르크계 사람들의 무덤 표식인 발발은 두 손을 배꼽 위에 모아 운명의 기름잔을 받들고 있는 형상이다.


발발 옆에는 아랍어로 보이는 글씨가 써 있는 비석도 여럿 눈에 보였다. 제대로 관리가 안되어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게 마음이 아팠다. 그러고 보니 촐폰아타에서 방문한 유목문화 박물관 현관문 옆에 있던 두 조각으로 깨진 암각화 바위가 생각났다. 암각화 공원 역시 곳곳에 소똥과 말똥에 자동차 자국이 보였다.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낙서였다. 암각화 일부에도 보였고 부라나 탑 꼭대기는 아예 낙서를 새로 할 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보잘 것 없는 이름으로 인류의 문화유산을 더럽힌 그 놈은 길가다 똥이나 밟아라. 아니지. 엎어져 똥덩이에 얼굴을 박았으면 좋겠다. 그리 저주를 되뇌었다.


629년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를 떠나 인도로 향하던 현장법사(玄奘法師), 602~664)는 이식쿨을 거쳐 이 일대를 지나갔다. 그는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청지(淸池; 이식쿨)의 서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소엽수성(素葉水城)에 이른다. 성의 둘레는 6∼7리이고 여러 나라의 장사치 오랑캐[商胡]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땅은 기장과 보리, 포도에 적합하며 숲은 우거져 있지 않다. 바람이 차서 사람들은 모직 옷[氈褐]을 입는다. 소엽의 서쪽으로는 수십 개의 외딴 성들이 있는데 각 성마다 각자의 우두머리를 옹립하고 있다. 비록 서로 명령을 내리거나 받지는 않지만 모두가 돌궐에 복속되어 있다.


밤 9시가 넘어서야 비슈케크에 도착했다. 고려인 3세가 운영한다는 골든드래곤호텔에 짐을 풀었다. 바로 옆 한국식당에서 늦은 저녁으로 소갈비를 원없이 먹었다. 키르기스스탄은 가축을 방목한다. 초원에서 풀 뜯어 먹은 고기라 그런건지 밤 10시에 먹는 저녁이라 그런건지 맛이 기가 막혔다. 그런 고기를 쌈채소에 김치에 찌개까지 곁들여서, 심지어 가격도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게 먹으니 피곤이 싹 가시는 느낌이다. 식당 이름이 ‘강남’이다. 


키르기스스탄 수도인 비슈케크는 1991년 독립 이후 명칭이다. 그 전까지는 제정 러시아 당시 이 키르기스 지역을 다스렸던 프룬제 총독을 따서 프룬제(Фрунзе)라고 불렀다. 현재 인구는 약 100만명이다. 비슈케크는 원래 말젖술인 쿠미스를 만드는 양가죽 포대를 가리키는 키르키스 단어라고 한다(정준희, 2012: 318). 비슈케크를 포함한 행정구역이 추이 주, 이식쿨에서 발원한 키르기스스탄 최대 강 이름도 추이 강이다. 추 대표는 “그래서 내가 키르기스스탄과 천생연분인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15세기 세계를 휩쓴 흑사병 발원지는

비슈케크를 끝으로 키르기스스탄 여행은 끝이 났다. 하지만 꼭 하나 언급하고 싶은 건 흑사병에 얽힌 이야기다. 6월에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독일과 영국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비슈케크 인근 카라 지가흐(Kara-Djigach)와 부라나에서 발굴한 14세기 인골에서 흑사병의 첫 단추를 풀 유전자를 찾아냈다.


당시 한 전염병 희생자의 묘비에는 시리아어로 “1649년(서기 1338년) 호랑이해. 이것은 신자 산마크의 무덤이다. 역병으로 사망했다”라고 쓰여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키르기스스탄은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흑사병 발원지인 셈이다. 동서교역로에 위치해 있다보니 여기서 1338년에 발원한 흑사병이 유라시아 전역으로 급속히 퍼지면서 세계사에 엄청난 충격을 일으켰던 셈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요기를 참조)

 

 

그것은 꿈이었을까

골든드래곤호텔은 쾌적했다. 며칠만에 와이파이를 연결해 필요한 메일이나 카카오톡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PCR검사결과도 다행히 모두 음성으로 나왔다. 24일은 조지아 음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명불허전이다. 조지아 요리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전통시장도 구경하고 대형쇼핑몰에 가서 기념품과 선물을 각자 이것저것 샀다.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역시 키르기스스탄에서 제조했다는 보드카와 꼬냑, 꿀, 초콜렛 등이다.


드디어 출발해야 할 시간이다. 마나스 공항에서 출국수속을 했다. 원래보다 한 시간 가량 연착이 됐다고 한다. 왜 안그렇겠나. 아스타나 항공인데. 비슈케크에서 알마티로 가는 비행기는 조종사가 낮술이라도 마신건가 싶을 정도로 송쿨 가던 버스 못지않게 흔들거린다. (너를 잊지 않고 있다. 아스타나 항공)


키르기스스탄 여행을 되짚어 본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역시나 코쇼이 코르곤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미지는 다른 무엇보다도 석인상(발발)이었다. 키르기스스탄 사람의 이미지는 내게 석인상에 깃든 다양한 표정의 인물들과 겹쳐 보일 것 같다. 키르기스프렌드 직원으로 여행에 동행했던 알마와 투르손에게 발발 사진을 보내줬다.

 

여행은 출발하기 전이 가장 설렌다고 한다. 키르기스스탄도 그랬다. 여행을 마치고 나면 언제나 아쉬움과 추억이 한 가득 남기 마련이다. 키르기스스탄도 내겐 한 편 꿈처럼 남았다. 그래도 아름다운 꿈을 꾸고 난 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며 슬피 울던 동자승보단 내 처지가 좀 더 나을 듯 하다. 나는 언제고 아름다운 꿈을 다시 꿀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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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여행경로는 여기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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