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처음으로 '태양의 후예'를 봤다. 정확히 말하면 지인이 페이스북에 공유해놓은 어떤 장면을 봤다. 주인공 유시진이 송혜교가 연기한 여주인공(극중 이름은 알고 싶지 않다)을 구출한 뒤 대통령이 나서서 작전수행에 따른 책임문제를 해결하는 2분 가량 되는 장면이었다. 뭐 대충 그런 장면인 듯 하다.
첫번째 내 반응. 씨바 토 나온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 장면이 정말 심각한 건 할마마마가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 대통령을 (감히) 저런 식으로 묘사했기 때문이 아니다. 최고존엄은 언제나 훌륭한 판단을 내리는 뛰어난 분이신데 옆에 있는 찌질이 간신들이 복지부동하며 지들 안위만 생각한다는 저 구도가 문제다.
이승만은 죄없다. 이기붕 등 간신배들이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고 부정선거했다. 이승만은 나중에 알았다.(출처는 여기. 읽지 말 것을 권해드린다)
박정희는 자나깨나 조국근대화만 생각했다. 돌아가시는 날에도 XX막걸리를 마시는 검소한 분이었다. 김재규나 차지철 같은 간신배들이 지들 권력욕 떄문에 유신하라고 부추기고 국민들 못살게 군거다.
할마마마는 죄없다. 십상시가 성총을 흐리는거다.(여기)
이런 구도에선 훌륭한 일은 모두 최고존엄이 하는거고, 잘못된 일이나 나쁜 일은 모두 간신배 탓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이 장면에 등장하는 저 '간신'은 누가 임명했나? 십중팔구 저 '간신'은 아주 오랫동안 대통령을 옆에서 보좌한 복심일게다. 그러니까 저 정도 건방을 떨 수 있는거다. '간신'들이 권세를 휘두르는 건 최고존엄한테 위임받은 권력이 크기 때문이지 최고존엄한테 사기를 잘 쳐서 그런게 아니라는 걸 잊으면 안된다.
(간신한테 장기간 사기당할 정도 최고존엄이라면 그 자체로 무능력의 극치이겠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드라마라고. 그냥 드라마로 보면 안되겠니?' 혹은 '그래 너 잘났다. 이 꼰대 색희야.' 하지만 '그냥 드라마일 뿐'인 드라마는 세상에 없다. 당신은 '배달의 기수'를 그냥 드라마로 보는게 맞다고 생각하나. '자유대한의 번영에 감동먹어 전향하는 북한간첩을 따뜻이 맞아주는 안기부 직원' 얘기가 나오는 어린이 소설이 그냥 소설일 뿐이겠는가 말이다.(그 소설은 내가 초등학교 때 실제로 읽어봤다.) 드라마에는 시대상이 담겨 있고, 세상을 바라보는 특정한 생각틀(프레임)이 짙게 깔려있다. 그러므로 '태양의 후예'는 그냥 드라마가 아니다.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훌륭한 주인공'과 '찌질한 간신배' 구도는 한국 드라마의 전형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특히 위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사극은 거의 이런 식이다.(주몽,대조영,연개소문... 사극드라마의 공식)
대다수 드라마가 세계를 그런 식으로 인식한다는 것이고, 드라마 시청자인 대다수 국민들이 그런 세계관에 동조하거나 수용할 가능성을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임금님한테는 병을 고쳐주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유럽 중세 사람들보다 과연 얼마나 더 나아진 것일까(여기를 참조)...
어느 학자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운명과 우리 행복을 우리가 아닌 누군가, 어떤 훌륭한 지도자가 대신 해줄거라는 맹목적 신념. 그것이 바로 파시즘을 부르는 씨앗이다.
그러므로 그 장면을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에 서둘러 정지시켜 버린 뒤 내 두 번째 반응은... 씨바 토 나온다.
'배달의 기수'가 텔레비전에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틀렸다. '배달의 기수'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그리고 우리 머리를 갉아먹는다.
사족: 난 내가 본 장면이 '태양의 후예'가 마지막회 가운데 일부인줄 알았다. 방금 들어보니 아직도 많이 남아있단다. 그러므로 내 세번째 반응은... 씨바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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