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 재해복구대책본부”.
대전에 있는 국가기록원에서 5·18민주화운동 자료를 뒤지다가 1980년 당시 광주시에서 작성한 한 문건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도지사 지시를 전하면서, “금번 광주사태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영세상인 및 사업체에 대한 피해복구 자금 지원 복구 대책 본부의 확인을 받아 취급은행에 융자 신청토록 할 것”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정부가 5·18민주화운동을 “재해”로 인식했으며, 적대적인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 “피해복구”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록물은 지난 2011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기록유산이 됐다. 5·18 기록물 중에서도 정부기록물을 주로 보관하고 있는 곳은 국가기록원이다. 국가기록원에는 70권 분량이다. 특히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에서 생산한 소요사태와 사태수습 관련 기록, 1988년 광주문제 치유대책 관련 기록, 특별법 제정 관련 기록, 1993~1994년 민주화운동 보상과 5·18묘역 성역화 관련 기록 등을 보유하고 있다. 주로 대전과 성남에 있는 서고에 보관중이다.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정부공식집계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이라는 주장이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있다. 국가기록원이 보존중인 정부 문서 중에는 1980년 5월 27일부터 날마다 추가되는 사망자수와 연고자에게 인도되는 상황을 기록해 놓아 사망자 처리 현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한 사망자처리일지가 단서가 될 수 있다. 이 자료에는 사망자 중 군인이 23명, 경찰이 4명인 반면 시민은 162명으로 돼 있다.
이 자료를 자세히 보면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총상이 124명으로 전체의 77%에 이른다. 특히 1세 미만 사망자가 2명, 11~15세 사망자가 6명, 16~20세 사망자가 29명이나 된다. 진실을 말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시대상황 속에서도 ‘창 밖으로 소요사태 관망 중 저격’, ‘숙직 중 계엄군 총상’, ‘퇴근시 총상’ 등 사망원인 기록을 통해 진실의 단편을 느낄 수 있다.
국가기록원이 보유하는 5·18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은 이해당사자나 학술연구자 등은 제한없이 열람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인은 개인정보 등 비공개대상 정보를 제외하고 공개한다. 국가기록포털을 이용하거나 대전 국가기록원을 방문해 사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수사와 재판기록에는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가 많다는 이유로 열람에 제약이 많다. 게다가 문서생산기관에서 비공개로 설정해놓은 자료들에 대해서는 재분류 작업이 필요하지만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사실 분량으로 보나 역사적 가치로 보나 5·18기록물을 가장 많이 보관하고 있는 곳은 지난 13일 문을 연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라고 할 수 있다. 동구 금남로 옛 광주가톨릭센터를 리모델링한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은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로 사업비 264억원을 투입해 3년 만에 완공했다. 원래는 지난해 4월 개관할 예정이었지만 전시관 디자인과 콘텐츠 미확정, 운영주체 논란 등으로 늦어졌다.
기록관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5·18 관련 기록물, 기념재단과 5·18 연구소 소장자료, 국방부와 국회에서 소장하는 자료 사본 등을 전시 보존한다. 5.18 당시 공문서, 시민군 일기장, 재판기록 등 4271권에 85만 8940쪽, 흑백필름 2017컷, 사진 1733장 등 방대한 분량이다.
기관관은 지상 1층에는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사실과 광주의 관광지를 안내하는 방문자센터로, 지하는 카페 등 시민공간으로 조성했다. 지상1층부터 3층까지는 ‘항쟁 5월의 기록, 인류의 유산’을 주제로 한 상설전시관이다. 4층은 민주인권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자료, 교양도서 등 1만여 점을 비치한 작은 도서관으로 운영한다. 작은도서관은 어린이 자료실, 일반자료실, 간행물실이 들어선다.
5층은 세계기록유산과 원본 기록물을 보존한 수장고, 6층에는 윤공희 전 천주교 광주대교장의 집무실 복원과 구술영상 스튜디오, 7층에는 세미나실과 다목적 강당을 갖췄다. 기획전시실에서 광주출신 작가들의 1980년 5월 광주를 주재로 한 ‘역사의 江은 누구를 보는가’ 기획전시전이 오는 7월 19일까지 열린다.
개관식에서 윤장현 시장은 “이 기록관을 통해 국내외 많은 사람들이 5월 광주의 높은 시민의식과 대동정신을 눈으로 확인하고, 민주·인권의 가치를 공유·학습하는 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음에도 5·18을 왜곡·폄훼하려는 일부 세력이 엄존하는 만큼 기록관이 5·18을 바로 알리는 소중한 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5·18민주화운동이란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 사이에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가리킨다. 1979년 10월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종신대통령이었던 박정희를 암살하고 나서 생긴 권력 공백을 이용해 12·12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광주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처음엔 총검과 곤봉을 사용했지만 이내 소총과 기관총까지 등장했고 수백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민들이 스스로 무기를 탈취해 시민군을 결성하고 저항에 나서자 계엄군은 5월 21일 시 외곽으로 후퇴한 뒤 5월27일 탱크와 헬리콥터를 동원해 시 전체를 점령했다. 그 기간 동안 광주에선 시민들이 정부행정기관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자체적으로 공동체 질서를 유지했다. 공식 기록으로는 광주와 주변 지역에서 시민 165명이 사망했고 76명이 실종되었으며, 3383명이 부상, 1476명이 체포됐다. 102명은 포위 당시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5·18은 오랫동안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광주사태에서 5·18민주화운동으로 정부 용어가 바뀌고 피해보상이 실시됐다. 1995년에는 국회가 가해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7년에는 5월 18일이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지정되었고 2002년에는,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묻었던 망월동 묘지가 국립묘지가 되었다. 피해자들은 국가유공자로서 수혜 자격을 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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