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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9 07:00

대한민국 총리 잔혹사


 이완구가 국무총리에서 물러난 뒤 새로운 총리가 누가 될 것인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홍원이 인기검색어가 되는 것에서 보듯 새 총리를 임명하는게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헌법조항에 따른 ‘책임총리’는 총리를 비서실장 정도로 여기는 대통령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1948년 이래 지금까지 재임했던 국무총리들의 면면을 통해  의전용 총리, 방패막이 총리 논란이 끊이지 않는 대한민국 국무총리라는 자리를 생각해본다.
 
 첫단추부터 꼬여4번이나 인준부결된 이윤영

 대한민국 국무총리는 첫 시작부터 순탄치 않은 자리였다. 이윤영은 이런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평북 영변군 출신 개신교 목사이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고초를 당했던 이윤영은 해방 이후 고당 조만식과 함께 활동하다 월남한 뒤 제헌의회 의원이 됐다. 1948년 이승만이 첫 총리 지명자로 이윤영을 지명했지만 다수당이던 한국민주당이 반대로 인준표결에서 부결됐다. 결국 이승만은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던 이범석을 총리로 지명해 국회인준을 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이승만 책임이 컸다. 애초 대한민국 제헌헌법 초안은 의원내각제를 모델로 했고 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승만이 이를 끝까지 거부하며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했다. 결국 의원내각제 기반 위에 대통령중심제를 덧붙이는 식으로 절충이 됐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제헌의회에서 선출됐다. 총리는 국회에서 표결로 선출해야 했다. 한민당은 이에 협조하는 대신 한민당 지도자인 김성수를 총리로 지명하라고 요구했는데 이승만이 약속을 깬 것이다.

 이윤영은 국무총리와 인연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1950년 4월에 다시 총리 승인요청을 했지만 국회표결에서 찬성 68표, 반대 83표로 부결됐다. 1952년 4월에도 장면이 총리에서 사퇴하자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국회에서 부결됐다. 그해 10월에 장택상이 총리에서 사임하자 이 대통령은 4번째로 이윤영을 총리에 지명하지만 또다시 국회에서 부결됐다. 결과적으로 이윤영은 총리에 4번 지명받고도 한 번도 국무총리가 되지 못한 유례없는 기록을 갖게 됐다.

 제2공화국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는 개헌을 하면서 국무총리가 사실상 국가원수로서 위상을 갖게 되었지만 5·16쿠데타 이후 다시 임명직 국무총리가 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무총리는 법적으로는 권한이 막강하지만 실제로는 인사권 자체가 전적으로 대통령 소관이기 때문에 실권을 가질 수가 없는 구조다. 노무현이 책임총리제를 강조하며 이해찬에게 상당한 권한을 주려고 노력했던 것 정도를 제외하면 대한민국에서 총리는 ‘방탄총리’ 논쟁을 벗어날 수가 없는 셈이다.
 
 히틀러 신봉자부터 친일파까지

 이윤영 부결로 인해 대한민국 초대 총리는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이범석이 됐다. 15세에 중국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홍범도 장군이 주도한 청산리전투에 참여했고 임시정부 한국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나치를 연구하고, 히틀러 사망을 매우 안타까워하는 등 나치 추종자란 논란을 일으켰다. 그가 ‘국가지상, 민족지상’을 내세워 결성한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은 나치 청소년단(유겐트)에 빗대 “이범석 유겐트’라는 비판도 받았다.

 역대 총리 가운데 3명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 4776명 가운데 포함된다는 것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특히 정일권·김정렬 두 총리는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속 장교로 복무했다. 특히 김정렬은 아예 태평양 전쟁에 조종수로 참전까지 했다. 장면은 종교계 총동원을 논의하는 시국간담회에 천주교 대표로 참석하는 등 활동을 했다.
 
 총리에 얽힌 각종 기록들

 이완구는 43대 총리이지만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이 취임한 뒤 현재까지 국무총리로 일했던 사람은 모두 39명이다. 4명은 총리를 두 번 맡았기 때문이다. 장면은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총리를 지냈지만 이승만과 갈등끝에 사임했다. 4·19혁명 뒤에는 내각책임제 정부수반인 총리에 선출됐지만 이번에는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총리에서 물러났다. 이밖에 백두진은 이승만·박정희 정부, 김종필은 박정희·김대중 정부, 고건은 김영삼·노무현 정부에서 총리로 일했다.

 이완구는 사의표명을 기준으로 하면 총리로서 가장 단명한 총리라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세우게 된다. 6대 총리 허정은 외무장관으로 재임하던 도중 4·19혁명이 일어나고 대통령 사임 등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임시로 맡은 총리였다. 22대 총리 노재봉은 1991년 1월에 취임한 뒤 명지대 1학년이던 강경대가 시위 도중 경찰에게 구타당해 숨지면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를 수습하는 차원에서 4개월만에 경질됐다.

 총리로서 재직일수가 가장 긴 총리는 9대 정일권이고 김종필이 두번째다. 정일권은 재임기간이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으로 한국 현실에서 이례적으로 장수 총리 기록을 세웠다. 김종필은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총리를 지냈지만 정일권이 세운 기록을 깨기엔 한참 모자란다. 민주화 이후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건 김황식이다. 그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약 2년 5개월간 재직했다.

 한국에서 총리는 전통적으로 노인들의 영역이다. 70대에 총리가 된 사람이 7명이나 된다. 취임 당시 가장 고령이었던 총리는 24대 총리 현승종과 32대 총리 박태준이다. 각각 74세에 총리가 됐다. 19대 총리 김정렬과 39대 총리 한승수는 73세였고 34대 총리 김석수는 71세였다. 8대 총리 최두선과 42대 총리 정홍원은 70세였다. 반면 4대 총리 백두진과 11대 총리 김종필은 취임 당시 46세, 9대 총리 정일권은 47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총리가 됐다.

 고향으로 살펴보면 이북 출신이 꽤 많다는 점이 눈에 띈다. 황해도 4명, 평남 5명, 평북 2명, 함남 1명으로 모두 12명이나 된다. 특히 노태우 정부 당시에는 강영훈(평북 창성), 정원식(황해 재령), 현승종(평남 개천) 등 총리 5명 중 3명이 이북 출신이었다. 단일 지역으로는 서울이 7명으로 가장 많다. 충남과 경남이 5명씩이고 경기와 전북이 4명을 배출했다. 

정일권은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나 유일한 재외동포 출신 총리라는 기록을 보유했다. 이밖에 37대 총리 한명숙부터 39대 총리 한승수까지 세 번 연속으로 청주 한(韓)씨에서 총리를 배출한 것도 특이한 기록이다.

충청총리 낙마했다. 부디 현수막에 걸어놓은 굳은 맹세 잊지마시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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