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당시 선내방송으로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 뒤 저에겐 그 말이 결코 써서는 안 되는 말처럼 돼 버렸습니다. 한 번은 제 아들과 밖에 나갔다가 아들이 뭘 물어보길래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라고 무심결에 말했다가 섬뜩한 생각이 번뜩 들어서 얼른 “잠깐만 기다려 봐.”로 말을 바꿨던 적도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데자뷔’라는 게 왜 이리 자주 등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산낭비 사례를 뒤지다 보면 1년을 주기로 끊임없이 데자뷔를 느낍니다만, 생각해보면 세상만사 비슷한 비극이 반복되는 게 참 마음이 아픕니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합니다. 범인은 문세광이었으며 그가 쏜 총탄에 영부인 육영수가 사망했습니다.
당시 경호원들은 평소에도 경찰을 함부로 대했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는데 그들이 행사 직전 경찰들에게 했다는 ‘명령’이 바로 “우리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말라”였습니다. 조금 의역을 해보면 결국 “가만히 있으라”고 했던 겁니다.
이 사건을 수사했던 합동수사본부 부본부장을 맡았던 이는 서울시경국장 이건개였는데 그는 [동굴의 대통령 열린 대통령](1996년)이란 책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문세광이가 일어나서 연단까지 뛰어가면서 총을 모두 7발을 발사했는데, 연단으로 가는 좁은 복도 양쪽에는 그 당시 중부경찰서를 포함해서 모두 경찰관들이 앉아 있었다. 문세광은 그들이 손을 뻗치면 잡을 수 있는 위치였고 또 발을 걸어서 넘어뜨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와 같은 일을 시도하지 않았다…… 결국 총을 다 쏜 뒤에 맨 앞에 있던 세무서 직원이 발을 걸어서 넘어뜨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가만히 있으라’는 평소의 강압적 지시, 그리고 이런 것은 경호실에서 알아서 하겠거니 하는 방관자적인 자세가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전북대 교수 강준만이 쓴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 편]을 읽다가 저는 “가만히 있으라”라는 환청 같은 데자뷔를 느꼈습니다. 그가 쓴 1974년 8월 부분을 발췌해 보겠습니다.
“그간 너무 비대해진 경호실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인 동시에 박 정권 체제가 사람을 얼마나 수동적으로 만든 체제인가를 잘 보여 준 사건”
애도를 표시하기 위해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5일간 광고가 전혀 없이 방송했고, 한 달 동안 연예 프로그램을 전면 중단했습니다. 애도와 추모 의미를 담은 프로그램이 한 달 내내 방송했습니다. 자발적으로 혹은 동원된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틀이 지난 17일, 빈소를 찾은 일반 조문객 수가 1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문세광은 김대중 구출 재일한국인대책위원회 오사카위원회 사무차장으로 활동했으며,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재일교포 2세들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것이 암살 미수 사건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문세광 암살은 조총련과는 무관했습니다. (물론 문세광은 선고 법정에서 “나는 육 여사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고 합니다.) 한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납치사건이 없었더라면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육영수 암살사건 부분을 읽으면서 박근혜가 어머니를 잃었던 당시 나이가 22세였다는 걸 떠올렸습니다. 단원고 학생들과 불과 네댓 살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 뒤 박근혜는 평범한(?) 대통령 둘째 딸에서 사실상 ‘영부인’이라는 간단치 않은 인생을 살게 되지요. (간혹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박근혜는 박정희의 둘째 딸이 맞습니다.)
처음에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40년 전에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죄 없는 어머니를 잃었던 대통령이라면 다시 한 번 ‘가만히 있다가’ 목숨을 잃은 죄 없는 수백명을 보고 이제라도 가만히 있지 말고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박근혜가 사고 당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을 방문해서는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던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고 말했다는 걸 알고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40년 전에도 그러더니 지금도 청와대 참모들이 엉망이구나 싶어 무척 한심해 보였습니다.(세월호 참사, 청와대 국가안보실 책임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고원인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석연치 않은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닌 ‘참사’ 와중에 뜻밖에도 우리는 대통령을 둘러싼 풍문(風聞)을 접하게 됐습니다. 최근에는 일본 산케이신문에서 비슷한 내용을 보도했고, 한 지인이 말한 바로는 홍콩에서도 보도됐다고 합니다.
청와대에선 사실무근이라며 7시간 동안 21번이나 보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중대본에서 나온 쌩뚱맞은 발언과 앞뒤가 전혀 맞질 않습니다. 7시간 동안 보고를 21번 받았고 이것저것 지시를 했다고 하면 세월호 현장에서 벌어진 일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시사만화가 ‘굽시니스트’가 시사IN에 실은 만화가 예사롭게 보이질 않습니다.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그런데도 대통령을 비롯해 청와대와 집권여당 모두 7시간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가만히 있으니’ 국민들은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속이 터진다고 외치는 국민들에겐 또다시 ‘가만히 있으라’는 대답만 돌아옵니다. 그렇게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다시 돌아 우리는 여전히 ‘가만히 있으라’ 혹은 ‘가만히 있는’ 현실을 접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분노’하고 눈물 흘리고, 단식합니다. 또 누군가는 ‘피로’해져서 유가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사태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기 때문이란 걸 분명히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슬로우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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