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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

진화하는 보이스피싱, 피해대책은 서민대책이다

by betulo 2008.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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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이 그치질 않는다. 피해자는 끊임없이 발생한다. 거기다 전화금융사기에 속아 돈을 입금했다 천만다행으로 계좌정지시킨 경우에도 돈을 되돌려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적지 않다. 금융감독원 관계자한테 들으니 그런 돈만 최소 200억원 이상이라고 한다. 피해자 대부분이 주부, 노인 등 사회적 약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서민대책 부재'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내 A 시중은행에 근무하는 B씨는 오늘도 '그분'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가 올 때는 같은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전화번호 순서로 '그분' 전화를 받는다. 1주일에 한두번씩 어김없이 전화를 하시는 ‘그분’.

오늘은 “C은행입니다. D백화점에서 카드를 쓰신 적이 있지요?”라고 묻는다. 이어 “당신의 신상명세를 타인이 도용해서 카드를 쓰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신상명세가 범죄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마포에서 교통사고를 내고 도망간 것으로 나옵니다. 큰일입니다. 저희가 대검에 이첩하겠습니다. 조금 있으면 대검 수사관이 전화할 테니 ‘사적인 행동을 자제하고’ 전화를 받으세요.”라고 말한다.

정말 ‘대검 수사관’이 전화를 하시고 그 다음에는 ‘검사’라면서 전화를 하신다. 세 번 모두 전화번호는 똑같다. 그분께서는 어떨 때는 B씨가 근무하는 A은행 카드팀에서 전화하는 행세를 한다. B씨가 “찾아갈테니 본점 몇층인지 알려달라.”라고 하면 “2층.”이라고 대답해서 “2층은 로비인데요.”라고 알려주자 곧바로 전화를 끊은 적도 있다.

B씨는 ‘그분’ 전화가 올 때마다 일부러 속는 척 하면서 전화를 오래 받으려 한다. “제가 전화를 오래 받는 동안에는 적어도 다른 사람한테 보이스피싱을 하지는 못하잖아요.”

진화하는 낚시질, 정체된 근절대책

낚시질은 진화한다. 2006년 6월 첫 피해가 발생한 이후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는 갈수록 수법이 교묘해지고 있다. 최초에는 세금·건강보험료·국민연금․보험금을 환급해 주겠다며 피해자를 현혹하여 현금지급기 조작을 유도했다. 최근에는 통신사나 금융기관․수사기관을 사칭해 ‘통신요금을 환급해 주겠다.’거나, ‘신용카드의 명의가 도용되었다.’ 혹은 ‘형사사건 피의자를 검거했는데 피해자 명의를 도용한 통장계좌가 나왔으니 피해자 계좌에 있는 예금을 보호하기 위해 보안코드를 설정해주겠다.’는 식으로 현금지급기 조작을 유도하는 수법까지 등장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1회 전화로 범행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금감원 직원 등을 사칭하며 수차에 걸쳐서 전화하여 범행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발신번호 조작이 가능한 인터넷 전화로 대검찰청ARS로 연결되도록 해 피해자를 속이는 대담한 사례도 있었다.

정치․사회적 현안을 이용하기도 한다. 입시철에는 대학에 합격했다고 하고 대통령 취임식 즈음에는 참석자로 선정됐다고 사기를 친다. 심지어 삼성특검에 적발된 부당징수 보험금을 환급해주겠다고 했다가 적발된 경우도 있다. 올해 처음으로 도입된 국민참여재판 배심원에 선정됐다는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피해도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불특정 다수에게 무작위로 전화를 거는 게 아니라 미리 입수한 개인정보를 이용해 사냥감을 정해놓고 ‘약한 고리’를 공략하기도 한다. 해외유학을 보낸 자녀들 둔 부모에게 ‘자녀를 납치했다.’고 협박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지방의 한 법원장까지 이런 방식에 걸려들기도 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06년 6월부터 지난 2월까지 보이스피싱 피해건수만 5702건, 피해액은 569억원에 이른며 이 가운데 총 4245건, 3016명을 검거했다. 지난해에만 3819건에 416억원 상당의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피해자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규모는 훨씬 더 크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보이스피싱이 기승을 부리면서 법원에서도 중형을 선고하는 추세다. 지난해 6월 보이스피싱에 가담한 대만인에게 창원지방법인이 징역 2년을 선고했으며, 지난해 9월에는 서울중앙지법이 보이스피싱으로 수천만원을 뜯어낸 혐의(사기ㆍ공갈)로 기소된 중국인 왕모(33)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고 범행에 가담한 중국인 곽모(25)씨와 장모(37)씨에게 각각 징역 3년과 2년6월을 선고했다. 단순가담자에게도 중형을 선고받는다. 지난해 6월 수원지법은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입금한 돈을 인출해 송금 담당자에게 전해준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5년이 선고된 대만인 3명의 항소를 기각하기도 했다.

종합대책 절실, 국가의 역할을 묻는다

경찰은 보이스피싱이 대부분 중국이나 대만에서 걸려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현지에 자체 콜센터를 운영하고 이들이 이용하는 금융계좌 역시 대포통장이 대부분이다. 한 일선 경찰서 관계자는 “출금된 돈은 거의 다 중국으로 흘러간다. 국부유출이 엄청나다.”면서 “범죄자들이 거의 인터넷전화를 사용하고 중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라서 입건이 쉽지 않다.”고 밝혔다.

정부 대책은 고작 대국민홍보와 금융계좌 이체한도나 외국인 명의 계좌개설 자격요건 강화 등에 그치는 실정이다. 그나마 경찰청에서 보이스피싱 전담반 설치를 검토하고 있지만 선거사범 수사를 마무리짓는 4월 이후에나 가능한 실정이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과 관계자는 “보이스피싱을 담당하는 일선 경찰서 지능팀이 선거사범 수사까지 하고 있어 당장은 인력운용에 여유가 없는 실정”이라면서 “현재 각 지방경찰청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경찰이 보이스피싱 전담반을 설치하더라도 범죄를 줄이는 효과는 있어도 기존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겐 큰 도움이 안되는 실정이다.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를 하면 경찰은 은행에 지급정지를 요청하고 피해자진술조서를 작성하고 추적수사에 착수한다. 하지만 이는 형사상 절차이고 은행계좌에 묶여있는 피해금액을 되돌려받으려면 개별 민사소송을 통해야 하는데 경찰은 법적으로 그 부분에 관여할 수 없다.

은행에서도 예금주 동의 없이 임의로 계좌에서 돈을 뽑아서 피해자에게 주는 것은 현행법상 불법행위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법원 선고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민사소송을 제기하더라도 6개월 가까이 걸리는 게 현실이다.

결국 금감원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지만 금감원은 피해금액에 대한 기초자료 수집도 안 할 정도로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7월 정부는 지급정지된 계좌를 신속히 처리하도록 법적 검토를 하겠다는 범정부종합대책을 발표했지만 검토 결과 재산권 침해에 따른 위헌소지가 높다는 결론이 나면서 유야무야된 이후 별다른 보완책이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중국인이나 조선족이 같은 날짜에 여러 계좌를 개설한다거나 대포통장이 의심된다거나 사고를 냈던 개설인의 인적사항과 개인정보를 이용해 계좌를 등록하는 등 사고의심계좌에 대해 계좌개설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게 전부다.

금감원 관계자는 “현황을 파악하는 업무가 체계화돼 있지 않다.”면서 “실태를 파악해봐야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도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는 “피해자 규모는 5000명 이상, 지급정지된 액수는 최소 200억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현행법상으로는 먼저 소송을 걸어서 승소한 사람이 자기 피해 범위 안에서 찾아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기존 법제도 보완으로도 범죄를 줄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한 교수는 “금융실명제에 따라 불법인 대포통장이 보이스피싱에 악용되는 것은 금융실명제 위반 처벌이 가볍고 은행들의 협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면서 금융실명제 위반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무분별한 통장개설에 따른 보이스피싱 범죄에 은행들의 책임을 일정 부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전문가는 “사기전화가 걸려올 경우 이용자들이 적극적으로 신고해 제2, 제3의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신고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통신사업자와 수사기관의 핫라인 개설을 통해 신고접수된 해외전화를 즉각 추적하거나 회선을 막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보이스 피싱(Voice Phishing) 전화(음성)로 개인정보를 불법적으로 알아내 이를 토대로 예금을 인출해가는 사기수법이다. 피싱은 개인정보(Personal Data)와 낚시질(Fishing)의 합성어라는 설과 그 어원은 fishing이지만 위장의 수법이 ‘세련되어 있다(sophisticated)’는 데서 철자를 ‘phishing’으로 쓰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초기엔 온라인 게임의 아이템을 훔치는 수준이었으나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자금융거래가 확산되면서 금융 사기로 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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