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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

외환위기 10년, 연매출 200억 사장에서 노숙자로...

by betulo 2007.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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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만 10년.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사장님이 한 순간에 노숙인 신세가 됐고, 평범한 사람들은 직장에서 쫓겨났다. 재기에 성공한 사람도 있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재기할 기운조차 없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누구는 부지런하고 누구는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게 아니었다. 외환위기를 겪은 두 사람의 인생역정을 통해 양극화 현상을 짚어 봤다. 나머지 한 분의 사연은 여기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외환위기 10년을 거쳐온 두 사람을 인터뷰한 기사를 쓰면서 낸 ‘전문’이다. “누구는 부지런하고 누구는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자칫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해서 중소기업 사장됐고, 누구는 지가 못나서 혹은 게을러서, 혹은 재기할 의지가 부족해서 노숙인 된 거 아니냐는 식으로 오해받을까 두려웠다.

두 사람 모두 외환위기라는 폭풍을 나름대로 헤쳐왔다. 잘했고 잘못했고도 없고 잘났고 못났다는 것도 없다. 다만 우리 주위의 수많은 ‘외환위기 피해자’들 중 한명 한 명일 뿐이다.

기사를 쓰면서 외환위기가 남긴 폐해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외환위기 당시 나는 군대에 있었다. 어느날 대대장이 특별교육을 한다며 모든 대대원들을 집합시켰다. 금요일이었다.

대대장 첫마디가 “너희들 IMF가 뭔지 아느냐?”였다. 대다수가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1주일짜리 빡센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정비하느라 정신없을 때였다. 대대장은 찬찬히 IMF부터 외환위기 등을 설명해줬다. 그리고 ‘고통분담’이라는 말도 해줬다. 그 말을 듣고서야 우리는 뭔가 무서운 게 닥치고 있다는 걸 짐작했다.

“고통분담 차원에서 이제부터 이등병부터 장군들까지 일괄 월급 몇 % 삭감한다. 건빵이나 컵라면, 맛스타(부식으로 제공하는 음료수) 없다. 1식3찬(한끼에 반찬 세가지)에서 1식2찬으로 줄인다.”

군바리는 단순하다. 먹는거 줄인다는 말에 모두들 경악했다. 다음날 아침 배식시간. 밥, 똥국(건더기 없이 된장만 갖고 만든 국), 포장용 김(김 10장 들었다), 배추김치 쬐금... 그걸로 끝. 그때 알았다. IMF가 얼마나 무서운 건가를 온몸으로 실감했다.

며칠 있다 월급받을 때. 병장 월급이 1만원이 안됐던 걸로 기억한다. 덴당할...

생각해보면 나는 그나마 별다른 피해없이 외환위기를 지나왔다. 군대에 있었고 그후 복학해서 공부하느라. 그리고 이러저러한 좌절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주위에 훨씬 많다는 걸 나도 안다.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외환위기를 힘겹게 헤쳐온 모든 분들께 부족한 글을 바치고 싶다.

“몸은 아픈데 돈이 없어서 파스 한 장 사기도 버겁습니다. 죽기 전에 자식들 얼굴이라도 한 번 봤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자식들 생각하면 서글퍼서 눈물만 나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지하철역 한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숙자의 모습. 국가가 나몰라라 하는 사이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서 하루 하루 살아야 한다. (구글 이미지검색에서 찾은 사진입니다)


서울 영등포 시장골목에 있는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노숙인 쉼터에서 만난 김모씨에게 외환위기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이었다.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동네 선배가 운영하는 주물공장에 취직한 김씨는 그 선배가 이민을 가면서 77년에 공장을 인수했다. 천막생활을 하면서 공장을 키워 처음에 9명으로 시작했던 회사는 외환위기 직전에는 60명까지 직원이 늘었고 연구실까지 두고 신제품을 개발했다.

“한창 잘 나가던 90년대 초에는 매출이 200억원까지 늘었습니다. 당시에는 거래처에서 돈을 싸들고 와서는 물건을 달라고 했어요. 밤낮 없이 공장을 돌렸죠. 그 때 무리하게 확장한 게 독이 됐지만요. 외환위기만 없었더라면 어음을 어떻게든 메꿔서 공장을 돌렸을 텐데 하도 정신없이 부도가 나니까 버틸 재간이 없었죠.”

●수면제 30알 먹고 자살시도

김씨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거래의 피해자다. “중소기업이 신제품을 개발하면 대기업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95%는 승인을 안 해줘요. 할 수 없이 대기업에 자료를 넘겨주면 대기업에서 1~2억원 정도 주고 우리에게 물량을 줘요. 개발은 우리가 하고 하청업체가 되는거죠. 수송비나 자재비 등 공제하면 남는 게 별로 없어요.”

그전에는 경기가 좋아 괜찮았지만 외환위기 3~4년 전부터 이상한 징조가 나타났다.

“돈이 어음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어음이 3개월 짜리가 6개월짜리로 오고 1년 짜리로 들어와요. 사채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죠. 그러다가 갑자기 외환위기가 터지고 나니 10억원 정도 부도가 났어요. 하도 어음만 들어오니까 260%까지 깡을 하니 100만원 중에 우리에게 남는게 100원 정도밖에 안되는데 빚이 빚을 낳는 상황이 반복됐죠.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김씨는 98년 1월쯤 집을 나와 보름 동안 도망다녀야 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돌아가셨다. “은행에서 공장에 경비를 세워놓고 집에는 빨간 딱지가 들어왔습니다.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 자체 해결할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어요. 채무자 등살에 견디지 못하고 아내를 이혼시켰죠. 소주 한 병 사들고 어머니 산소에 가서 수면제 30알을 먹었어요. 그때가 98년 3월쯤이었죠.”

다행히 지인이 쓰러져 있던 그를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4박5일 동안 입원해 있다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

●갈 곳이 없어 시작한 노숙인 생활

자살 시도 이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김씨는 건망증이 심해지고 항상 정신이 몽롱했다. 그런 상태로 노숙인이 뭔지도 모르는 채 공사장이나 다리 밑에서 잠을 잤다. 자루 하나 메고 병을 줍고 구걸해서 100원씩 얻기도 하고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밥 달라고 사정하는 생활이었다. “도둑질 빼고는 다했습니다. 1년인가 2년인가 반쯤 미쳐서 다녔지요.”

같은 처지의 노숙인들한테 알게 된 ‘노숙인 쉼터’도 가봤지만 예배를 강요하는 게 괴로워 도망쳐 버렸다. 반년 동안 돈도 못받고 목수 일을 배워서 재기하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몸이 너무 망가져 있었다. 우연히 지금 이곳에 와서 안정을 찾긴 했지만 일을 할 수 없으니 돈을 모을 방법이 없다. 눈이 나빠져 형광등 불빛도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관절이 나빠 오래 걷지도 못한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돼서 받는 37만2000원이 그의 수입 전부다.

●돈이 없어 파스도 제대로 못붙여

그가 아픈 몸을 치료하는 수단은 ‘파스’가 전부다. 김씨는 “예전에는 파스가 한 20장씩 나왔는데 무릎과 팔에 두장씩만 이틀에 한 번씩 붙여도 120장은 된다.”면서 “법이 바뀌고 나서 6월쯤 되니까 그전에는 그냥 주던 걸 25장으로 줄이고 7월부터는 한 장도 안준다.”고 말했다.

김씨에겐 두가지 소원이 있다. 하나는 재기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치료를 받는 것이다. 김씨는 “나도 세금 꼬박꼬박 내던 사람이다. 조금만 신경써 주면 기술이 있으니까 뭐든 할 수 있는데 국가가 제대로 치료도 안 해주면서 파스 팔아먹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우리만 죽이려 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에겐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다. 아들은 아내가 처가가 있는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미국으로 떠났고 딸은 동사무소에 갔다가 시집가서 인천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됐다. 김씨는 “딸만 찾으면 식구들 소식을 알 수 있을 텐데 소식을 몰라 한숨만 쉬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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