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싯적에 배운 것 중에, 교과서에는 절대 나오지 않으나 지금도 기억나는 게 ‘주관적 정세분석’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있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윤석열의 계엄 선포는 주관적 정세분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역사책을 조금만 훑어보면 주관적 정세분석의 폐해와 부작용 사례를 숱하게 찾을 수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최후의 교훈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주관적 정세분석의 최근 사례는 모사드일 듯하다. 뉴욕타임스(NYT) 22일(현지시간) 보도를 보면 이스라엘 대외정보기관인 모사드는 이란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면 이란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켜 이란 체제를 무너뜨릴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모사드는 “전쟁이 시작되면 모사드가 이란의 반정부 세력을 결집해 폭등과 체제 붕괴를 유도할 수 있다”고 자신했고, 이런 판단을 신뢰한 미국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일으켰다가 이 꼴이 됐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엔 정말 어처구니가 없고 말도 안 되는 이 주관적 정세분석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 꼭 하나 꼽고 싶은 건 ‘피해자의식’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피해자’라는 인식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정당성을 지나치게 믿게 된다. 더 심하면 ‘나는 옳다’는 확신에 빠져 판단 자체를 그르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홀로코스트’ 경험을 강조하는데, 물론 홀로코스트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되는 비극인 건 틀림없다고는 하나, ‘우리는 피해자니까’ 하면서 동네방네 휩쓸고 다니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사실 ‘피해자’라는 자기인식은 꽤 힘이 세다. 특히 ‘우리가 피해자’라는 의식은 우리들의 동질감과 단결력을 높이는 데 무척 효과적이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건, ‘우리만 피해자’라는 인식이다. 가령 일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으로 인한 피해 본 걸 강조하지만, 원폭 희생자 가운데 10% 이상이 식민지 조선 출신이라는 것도 함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릇이다.
피해자의식이 무서운 건 적대감을 동반하기 때문이고, 더 무서운 건 가해자의 논리를 내재화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다룬 책에서 가장 소름 끼쳤던 건 초대 총리였던 다비드 벤구리온이 유럽을 방문해 “우리는 유럽입니다”라고 연설했다는 대목이었다. 가해자였던 나치가 ‘유대인은 유럽인도 아닌 열등한 집단’이라고 규정했는데, 이제 신생국가 이스라엘이 ‘유대인은 유럽인’이라고 강조한 사실은 ‘비유럽인’을 전제하는 것임과 동시에, 가해자의 논리를 변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건국 당시부터 지금까지 ‘비유럽인’들에게 벌이는 행태를 보자. 가해자와 피해자를 익명 처리한 뒤 사실관계만 나열한다면, 가해자가 히틀러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미국이나 유럽이 틈날 때마다 반성하는 홀로코스트의 기억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스라엘 편들기 사이의 괴리가 더는 괴리가 아니게 느껴진다.
중학교 때 읽은 어떤 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곳에서 살지만, 유대인들은 ‘키부츠’라는 협동농장에서 힘을 합쳐 사막을 옥토로 바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유대인은 세계에서 제일 똑똑하고 부지런하지만, 아랍인들은 게으르고 무식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스라엘 농부들이 일하는 푸르른 키부츠는 원래 그곳에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은 뒤 차지한 것이라는 걸 대학생이 되어서야 알게 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막 먼지 날리는 황무지에서 사는 건 살기 좋은 땅에선 살 수 없게 쫓겨났기 때문이었다. 마치 미국 원주민들이 황량한 사막에 있는 ‘보호구역’에서 지내듯이.
전쟁은 언제나 민간인들, 특히 가장 약한 사람들의 고통과 비명으로 가득 찬다. 이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무작정 덮고 가는 방식이라면 언제든지 비극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행태와 그 근저에 자리 잡은 피해자의식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시급해 보인다.
| 인권연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
| 2023년 외교안보 전망, "위기 국면, 전략이 안보인다" (0) | 2023.01.03 |
|---|---|
| 우크라이나 국방차관이 말하는 '전쟁과 평화' (0) | 2022.12.18 |
| 중국이 잠정조치수역에 설치한 구조물, 알고보니 연어양식시설 (0) | 2022.05.03 |
| 전직 외교관의 직언 “한국인 대외인식, 천동설에서 벗어나야” (0) | 2021.11.09 |
| 일본 반핵운동가가 말하는 ‘후쿠시마 10년’ (0) | 2021.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