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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쏟아지던 키르기스스탄,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처음 만났던, 그 모든 순간들>

by betulo 2025. 11. 9.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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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만났던, 그 모든 순간들 004>

  키스탕? 키르기스스탄에 다녀왔다고 했더니 잘못 알아들은 친구가 엉뚱한 말을 한다. 키르기스스탄이라고 재차 말했더니 이번엔 키르기스탄으로 잘못 말하더니 한 마디 덧붙인다. 근데 키르기스탄이 어딘데? 어딘지 알려줘도 별로 감흥이 없는 듯 하길래 한마디 더 해줬다. 우리가 해방되고 지금까지 대통령 두 명 쫓아냈는데 이 나라는 독립한지 30여년에 벌써 대통령 세 명을 갈아치웠지. 그제서야 관심을 보인다. 그렇게 실없는 얘기를 했던 게 벌써 2년 전이다. 이제는 우리도 느자구없는 대통령 셋을 쫓아내 키르기스스탄과 맞먹을 수준으로 올라섰으니 기특한 노릇이다.

  중앙아시아에 스탄으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다섯인데 어쩌다보니 세 나라를 가봤다. 세번째로 간 곳이 키르기스스탄인데, 운이 좋아서 일주일 동안 이 나라 곳곳을 누볐으니 그 또한 내 복이라고 해야겠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건 <나는 걷는다>(효형출판, 2003)를 읽었을 때였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라는, 프랑스 할아버지가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출발해 중국 시안까지 오로지 두 발로 걸어서 여행한 이야기를 묶은 책이다. “나는 여행하고, 나는 걷는다. 왜냐하면 한쪽 손이, 아니 그보다 알 수 없는 만큼 신비한 한 번의 호흡이 등 뒤에서 나를 떼밀고 있기 때문에(3권 464쪽).” 이 말이 너무나 와닿았고 또 그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여행기였다. 나도 이 프랑스 할아버지처럼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쉬지 않고 걷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아쉬운대로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는 미리 내려서 10분이라도 더 걷게 된 건 순전히 이 책 덕분이다. 

  이 책에서 올리비에가 가장 애정을 담아 소개한 나라가 키르기스스탄이었다. 경치는 눈을 못 떼게 아름답고 사람들은 여행객에게 너무나 친절한 곳. “나는 키르기스스탄에 매료되었다(3권 103쪽).” 일부러 본문에 사진 한 장 없는 이 책에서 키르기스스탄 부분을 읽다보면 키르기스스탄을 상상하게 되고 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기회는 도둑처럼 찾아왔다. 코로나19로 여러 해 해외에 못나간 끝에 키르기스스탄에 갈 기회가 생겼다. 지금이야 키르기스스탄으로 가는 직항편이 있지만 당시엔 7시간 걸려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간 다음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로 환승을 해야 했다. 계획대로라면 오후 5시 40분에 알마티 공항을 출발해 6시 40분에 비슈케크 공항에 도착해야 했지만 아스타나항공의 엉망진창 일처리 때문에 공항에서 날을 새고 다음날 아침 8시 무렵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시작이 순탄치 않긴 했지만 첫 행선지인 송쿨(Соң-Көл) 가는 길부터 경치가 너무 멋지니 일행 모두가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초원 위에 거친 모래로 빚어놓은 듯한 누르스름한 민둥산 줄기가 앉아있다. 거기다 마무리로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봉우리를 얹어놓은 풍경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그렇게 난생 처음 키르기스스탄을 만났다. 

  송쿨은 키르기스스탄에서 이식쿨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호수다. 둘레가 29km, 폭이 18km나 된다. ‘쿨’은 호수를 뜻한다. 가는 길은 줄곧 오르막길이다. 낭떠러지를 옆에 끼고도 과속을 마다하지 않는 운전기사 덕분에 호숫가 의자에 앉아 보드카로 목을 축이고 양고기로 배를 불리며 해가 지고 별이 보이는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별이 하늘에서 쏟아진다. 여행의 풍미를 더하는 건 카메라 기능 말고는 쓸 데가 없어진 스마트폰이다. 와이파이는 고사하고 전화통화도 안되니 디지털 디톡스가 따로 없다.

  송쿨을 떠나 키르기스스탄이 자랑하는,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이식쿨(Иссык-Куль)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가는 여행을 계속한다. 따뜻한 호수라는 뜻이다. 길이가 180km, 폭 70km나 되는 이식쿨은 수평선 너머 파도가 치는 걸 볼 수 있을만큼 크다. 해발 1600m에 위치해 있고 가장 깊은 곳은 700m나 된다고 하니 말 그대로 바다나 다름없다. 

  현지 여행사 직원인 알마한테 마법주문도 배웠다. 이 주문만 외우면 키르기스스탄 사람들과 악수는 기본이고 호감과 매력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다. “칸다이 스스브(Кандай сызбы).” 대략 “잘 지내십니까”라는 의미인데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써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대충 이틀을 연습을 하고 나니 주문이 입에 붙었다. 무심한 듯 말타고 지나가던 아저씨가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게 할 정도로 효험이 있다. 고맙다는 말은 “라흐맛(Рахмат)”이라고 하는데 마법주문과 함께 쓰면 효과가 두 배다.

  뭐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는 키르기스스탄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스카즈카(Сказка) 협곡과 알틴아라샨(Алтын-Арашан)이다. 스카즈카는 붉은 느낌이 나는 황토색으로 된 바위가 끝없이 이어지고 그 뒤로는 푸른 이식쿨이 펼쳐져 있는데, 일행 가운데 사진 찍어주는 게 특기인 고 작가가 찍어준 내 사진은 지금도 내 노트북 초기화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알틴아라샨은 키르기스어로 ‘황금 치유 열쇠’를 뜻한다고 하는 해발 2500m가 넘는 산이다. 우리 일행은 중턱에 있는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산장에서 바라본 풍경은 정말이지 반칙이다. 세상에 이렇게 예뻐도 되는 것인가. 너른 언덕엔 말떼와 소떼가 풀을 뜯고 그 옆으론 높이 수십미터는 될 듯한 침엽수가 우뚝 솟아 있다. 저 멀리 눈으로 하얗게 덮인 봉우리가 보인다. 그런 풍경을 보며 보드카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하는 동안 해가 지고 별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그 별을 보며 또 술 한 잔 먹새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그런 와중에도 산장 한켠에선 고 작가의 은하수 화보촬영회가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성벽 흔적만 남은 코쇼이 코르곤(Кошой-Коргон) 유적, 선사시대 암각화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촐폰아타(Чолпон-Ата), 투르크계 사람들의 무덤 표식으로 두 손을 배꼽 위에 모아 운명의 기름잔을 받들고 있는 형상을 돌에 새긴 발발까지. 정비가 잘 돼 있는 한국과 달리 날 것 그대로 비바람을 버티며 서 있는 문화유적을 둘러보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인 곳이 키르기스스탄이다. 물론 제대로 관리가 안되어 암각화나 비석, 발발이 길가에 방치되어 있거나 소똥 말똥, 심지어 낙서자국으로 훼손된 걸 보는 건 마음 아픈 노릇이다.

  여행은 출발하기 전이 가장 설렌다고 한다. 키르기스스탄도 그랬다. 여행을 마치고 나면 언제나 아쉬움과 추억이 한 가득 남기 마련이다. 키르기스스탄도 내겐 한 편 꿈처럼 남았다. 그래도 아름다운 꿈을 꾸고 난 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며 슬피 울던 동자승보단 내 처지가 좀 더 나을 듯 하다. 나는 언제고 아름다운 꿈을 다시 꿀 수 있으니까.

더 자세한 키르기스스탄 여행기는 다음을 참고하시라. https://www.betulo.co.kr/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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