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처음 갔던 날 나는 길을 잃었다. 해가 지면서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돌아가야 할 집을 찾지 못해 한여름에 식은땀을 흘리며 두리번거렸다. 내 옆에는 사돈댁 여자아이가 한 손으론 내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맛있게, 그리고 세상 태평하게. 세 살 짜리, 미국 나이로는 두 살 먹은 꼬꼬마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시작은 순조로웠다. 미국에 사는 누나 덕분에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됐다. 공항 입국장에는 누나네 막내 시누이가 마중나왔다. 누나는 시카고에서 시부모와 미혼인 시누이 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내가 1년간 지낼 곳이기도 했다. 짐을 내려놓고 인사도 하고 하는 와중에 근처에 사는 누나네 큰시누이가 나에게 ‘간단한’ 부탁을 했다. 집 근처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둘째딸에게 사달라며 돈을 쥐어주었다.
길은 얘가 다 아니까 그냥 따라갔다가 오기만 하면 돼.
조그맣고 예쁘장하게 생긴 그 꼬마는 처음 보는 내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대범하게 걸어가는 그 꼬마 손을 잡고 따라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가게에 도착했고 아이스크림을 샀다. 하나도 어려울 게 없는 심부름이었다. 이 꼬마가 아이스크림을 먹느라 정신이 팔려서 돌아오는 길에 집을 지나쳐 한참을 걸어가기 전까지는. 아이가 잡아끄는대로 몇 분 걷다보니 뭔가 이상했다. 이 길이 맞느냐고 물었더니 꼬마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으면서.
몰라.
그때부터 패닉이 시작됐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집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높은 건물처럼 기준이 될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필이면 해가 지며 노을이 비치고 있었다. '미국은 밤만 되면 총소리가 들리는 위험한 곳'이라는 오래된 선입견이 머리를 쥐어짜며 길치 청년을 압박했다. 더구나 세 살 짜리 꼬마는 아이스크림을 얼추 다 먹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칭얼댈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다가가서 외워둔 주소를 불러주며 길을 물었다. 그가 친절하게 그리고 길게 설명을 해줬다.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번째 지나가는 사람은 영어를 나보다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국 사람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 아임쏘리 아이돈노우 잉글리시.
세번째는 어떤 소년이었는데 다소 짧게 몇 마디로 길을 가르쳐줬다. 물론 말을 알아들은 건 아니었고 그 소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갔다. 거기에 내가 찾는 집이 있었다. 짧은 국제미아 신세는 그렇게 끝이났다. 다음날 아침 일찍 노트를 들고 혼자서 집을 나서 집 주변 약도를 그려가면서 돌아다녀봤다. 그제서야 동네 지도가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된 매우 창피해서 불편한 진실. 내가 길을 헤맨 곳은 목적지에서 수십미터도 안되는 곳이었다.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뒤 1년을 미국에서 보냈다. 미국 생활은 꽤 괜찮았다. 영어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게 특히 즐거웠다. 미국에서 주소를 읽는 방법을 일단 익히고 나면 길을 찾는 게 그렇게 쉬울 수가 없다. 자전거 한 대에 의지해 시카고 곳곳을 싸돌아다녔다.
이란 출신인 동시에 유대인인 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도서관 사서, 옛 소련 시절 군대에서 태권도를 배웠다는 러시아 아저씨, 불가리아에서 과학교사를 했던 아줌마, 나와 생년월일이 똑같아서 서로 놀랐던 리투아니아 청년, 에스토니아에서 온 아가씨, 고등학교 때 유도부에서 운동했다는 일본 유학생, 한때 위대한 나라였지만 터키 때문에 쪼그라들었다며 옛 전성기를 그리워하는 아르메니아 할아버지, 한때 위대한 나라로 되돌아가길 바라는 터키 육군 장교 출신 내 친구 이스마엘.
그들은 모두 일자리와 성공, 기회를 찾아 미국에 왔다. 이민을 선택한 사람들은 미국을 새 고향으로 삼았다. 공부하러 온 사람들은 미국에 온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며 세계를 경험했다. 나 역시 미국으로 이민 온 새 미국인들을 만나고, 조상이 미국으로 건너 온 미국인들을 만나며 세계를 보는 눈이 확 넓어졌다. 미국을 보는 시각 역시 예전같을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지냈던 때가 1999년부터 2000년이었던 영향도 적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경제호황이었고 자신감이 넘쳤다. 외국인들에게 그토록 친절했던 시기는 그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미국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함께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세 살 짜리 꼬마와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