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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생각

책꽂이 정리에서 배우는 지출구조조정의 기본 원칙

by betulo 2020.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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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하나씩은 갖고 있습니다. 수십년간 구두를 닦는 일을 한 사람은 구두만 보면 구두 주인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성격인지 대략 파악한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단연 책이 기준입니다. 제 기준으로 보자면 책꽂이란 그 사람의 두뇌 속을 민낯으로 펼쳐보이는 거울입니다. 책이 많은지 적은지, 어떤 종류 책이 주로 꽂혀 있고 어떤 식으로 배치하는지 살펴보면 그 사람의 두뇌속 취향과 관심사가 대략 보입니다. 


최근 재미있게 본 영화 <나비잠>을 보면 소설가인 주인공이 집에 있는 책을 모조리 색깔에 따라 구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색색이 예쁘게 배치돼 있는 책꽂이는 이 영화의 예쁘장한 화면구성과 어울려 주인공의 미적 감각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색깔을 통해 감성과 분위기를 표현하려는 감독의 속내가 드러나는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전여옥이'박근혜 집에 가서 보니 책은 많은데 배치가 두서없더라'는 말했다는 얘길 들었을 때 제가 느낀 기분이란 '저런 분이라면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 정도 되겠습니다. 



이사를 했습니다. 같은 동네에 같은 길에 있는 몇 집 건너 새 집입니다만 이사는 역시 할 일이 넘쳐나는 대형공사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게 가장 큰 일은 역시나 책정리. 포장이사 직원들의 허리 꽤나 아프게 해서 이사할 집으로 책상자를 바리바리 옮겼습니다. 새 집에 들어갈 책꽂이 배달이 늦어져서 일단 거실 한켠에 책을 쌓아놓습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감당이 안될 정도로 창대합니다. 나중에 책꽂이 설치가 끝나고 나니 본격적인 책정리를 시작합니다. 새 집은 거실 한켠을 모조리 책꽂이로 펼칠 수 있어서 드디어 머릿속에 있는 책배치를 온전히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납니다. 제가 가진 책이 몇 권인지는 제대로 세어 본 적이 없습니다만 대략 2000권 가량 되는 것 같습니다. 책꽂이는 거실에 새로 산 가로 120센티미터에 세로 2미터 조금 넘는 4개, 안방에 배치한 비슷한 견적 책꽂이 2개, 그리고 서재에 둔 높이 1미터 정도, 가로 2~3미터 작은 책꽂이입니다. 


가장 왼쪽, 창가 가까운 쪽은 '생각'에 관한 책으로 시작합니다. 모름지기 생각은 항시 왼쪽을 향해야 하는 법이지요. 사회과학방법론, 사회과학 이론에 대한 책을 아래칸에 두는 걸로 시작해 <생각의 탄생>이나 <도덕, 정치를 말하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와 같은 책을 거쳐 <오리엔탈리즘>이나 <성의 역사> 등 담론분석으로 이어집니다. 그 다음엔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집니다. <역사는 끝났는가>나 <말이 칼이 될 때>, 그 한켠엔 <세계인권사상사>같은 인권 관련 책도 들어갑니다. 그 오른쪽에는 흔히 북한이라고 부르는 조선에 관한 책, 남북한 관계에 관한 책들, <피스메이커> <70년대 대화> <냉전의 추억>을 펼칩니다.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폭격> 등 해방정국과 전쟁에 관한 책이 아래쪽 두 칸을 차지합니다. 


이제 종횡사해를 할 시간입니다. 일본과 중국,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미국, 러시아, 유럽 등 지역 관련 책으로 뻗어 나가다가 국제정치나 국제관계, 지정학 등 개별 국가보다는 지구 전체를 조망하는 <근대세계체제>나 <대항해시대> 같은 책으로 마무리해줍니다. 그 오른쪽엔 경제사, 국제경제 등 경제 관련 책들 차지입니다. 현실 속 한국경제로 매듭을 지은 다음에는 복지국가와 조세/재정 등 특정한 제 주요 관심사를 반영하는 책으로 마무리합니다. 대미를 장식하는 건 <감세국가의 함정>과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으로. 


세상일이 뜻대로 되진 않는게, 한국-일본-중국-동남아-미국-러시아-유럽-남미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 역사책도 배치하려 했습니다. 일본 고대사는 일본 자리에, 고대 로마사는 유럽 자리에, 중앙유라시아사는 그 중간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책을 채워넣다보니 공간이 모자랍니다. 고민끝에 20세기 이전 역사책은 안방 책꽂이로 모조리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안방엔 <태백산맥> <임꺽정> <장길산> 같은 대하소설로 주루륵 꽂아 넣어 안방 머리맡에 두면 딱 좋겠다 싶었습니다만, 역사책에 밀려 서재 키낮은 책꽂이로 밀려났습니다. 다행이라면 소설은 사실 많질 않아서 얕은 책꽂이에 모두 몰아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놓고도 거실 책꽂이 공간이 모자라서 고민끝에 세웠던 책을 눕히는 안타까운 사태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 집에선 책을 모두 세우고 중간중간 장식품 같은 것도 세워두고 싶었습니다만 한정된 공간에 책을 넣으려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가진 책이 종류별로 대략 견적이 나옵니다. 이러저러한 역사책이 3할, 문학이 1할, 각 나라별 책과 국제정치가 1할, 경제사와 국제경제 등 경제 관련이 1할, 현대 남북한과 전쟁, 정보 등이 1할, 이론 관련이 1할, 예산과 복지국가 등 관심사가 1할. 뭐 이 정도 되겠습니다. 결국 제 머릿속 관심사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으로 시작해 한국사회를 거쳐 남북을 넘어 세계 여러나라로 뻗어가다가 정치와 경제로 간 다음 세금문제, 예산문제, 복지국가 등 대안을 향해갑니다. 역사는 사실 별도 자리를 차지한다기 보다는 지성사, 문화사, 한국사, 일본사, 중국사, 러시아사 등 각국 정치와 경제의 토대를 구성합니다. 모든 훌륭한 소설가들에겐 매우 죄송스럽습니다만 문학은 메인메뉴만으로 너무 배가 불러 건너뛸 수밖에 없는 맛있는 디저트같은 존재입니다. 


책꽂이란 집크기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무한정 늘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책꽂이가 모자라니 있는 책을 무작정 버리라고 하는 건 말도 안됩니다. 한정된 공간 속에서도 필요한 책이라면 갖추는게 맞습니다. 자리가 정히 부족하면 세우던 책을 눕혀서 공간을 더 만들거나, 그래도 모자라면 덜 중요하다 싶은 책은 구석으로 밀어내고, 상자에 담아 베란다로 옮기기도 합니다. 마지막 순간엔 눈물을 머금지 않을 만한, 10년 넘게 쳐다보지도 않았던 책을 엄선해서 알라딘 중고서점으로 향합니다. (그렇게 쌓은 적립금으로 또 책을 삽니다. 이하 무한반복…) 이번에 저 역시 고민끝에 책과 자료를 높이 3미터 가량 되도록 버렸습니다. 이번엔 큰맘먹고 <로마인이야기>를 통째로 버렸습니다. (<로마의 일인자>가 있는데 <로마인 이야기>는 뭐하러 세상에 나왔답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책꽂이 정리란 지출 구조조정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긴급재난지원금을 둘러싼 논쟁이 일단락됐습니다. 대한민국 전체 가구의 90% 이상이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청해서 지급받았다고 합니다. 모두가 처음 겪어보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제껏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정책이 현실화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심각한 논쟁도 벌어졌습니다. 대체로 더불어민주당과 일부 광역자치단체장, 총선 전 미래통합당이 논쟁의 한 축이었습니다. 기획재정부와 총선 뒤 미래통합당이 또 한 축이었습니다. (청와대는 어느 쪽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뭐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긴급재난지원금을 둘러싸고 다양하게 벌어진 논쟁은 하나같이 국가운영의 방향에 대한 철학, 더 깊게는 세계관을 바닥에 깔고 있습니다. 특히 재정건전성과, 그 하위 범주인 지출구조조정은 두고 두고 생각해봐야 할 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혼선의 발단은 3월 30일 문재인 대통령이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속하게 집행하도록 정부는 뼈를 깎는 세출 구조조정으로 2차 추가경정예산안을 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밝힌 대목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긴축을 주문함으로써 기재부를 위시한 금송아지 숭배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줬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지출구조조정을 위해 질병관리본부와 지방 국립병원 소속 공무원들의 연가보상비를 삭감했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주말에도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게 할 짓이냐는 욕을 먹었습니다. 그러자 기재부는 형평성을 맞춘다며 모든 정부부처 공무원들의 연가보상비를 다 삭감해버렸습니다.


한국은 지출구조조정이라는 담론이 너무 강력합니다. 그린뉴딜을 고민하는 이들이 그린뉴딜을 위한 재원마련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최근에 접하고 마음이 무척 안타까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린뉴딜이 정말 국가를 위해 미래를 위해 중요하다면 하면 됩니다. 재원마련 못한다고 그린뉴딜 안할게 아니라면 재원마련 고민하느라 금송아지 숭배자들과 논쟁할게 아니라 그린뉴딜이 왜 국가와 미래를 위해 중요한지 정부와 국회와 국민의 의견을 모아나가는게 맞는 방향 아닐까요? 그리하여 그린뉴딜이 꼭 필요한 국가정책이라는 합의가 나오면 단기, 중기, 장기 목표를 세우고 그에 맞춰 어느 정도 예산이 필요한지 산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필요재원은 어떻게 조달할까요. 저는 보편증세를 강력히 지지하는 사람입니다만, 보편증세를 하기 전에는 그린뉴딜 꿈도 꾸지 말라는게 아니라면 재원조달에 앞서 그린뉴딜이 먼저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정된 재원 범위 안에서 강력한 그린뉴딜을 한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결론을 내린다면 필요한 재원은 기획재정부에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기재부는요, 마른 수건 쥐어짜기가 특기입니다. 정히 재원마련 힘들면 기재부가 앞장서서 증세방안을 만들어낼겁니다. 그것은 책꽂이에 책을 집어넣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책꽂이 모자란다고 필요하고 읽고 싶은 책을 못사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두고두고 곱씹어야할 건  2006년 1월 18일 노무현 신년연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재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지출 구조를 바꾸더라도 재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미래를 위해서 해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면, 어디선가 이 재원을 조달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감세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론조사를 해보아도 세금을 올리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껴 쓰고, 다른 예산을 깎아서 쓰라고 합니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정책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상력에 제한을 두지 말라”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천재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그래서 책을 읽습니다. 문 대통령에게 <노무현 대통령 연설문집>을 읽고 상상력 좀 키워보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연설문집>을 대통령 집무실 책꽂이 어느 자리에 배치할지도 고민해보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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