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갑론을박 끝에 또 한 고비를 넘었지만 아직 끝난게 아니다. 국회 논의는 또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긴급재난지원금에서 한가지 분명한 건 진행과정이 전혀 긴급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도인 듯 하다. 그냥 이름은 ‘여유만만 재난지원금’으로 짓고 ‘올해 안에는 지급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했더라면 김칫국으로 헛배만 부를 일은 없었을텐데.
코로나19 국내 첫 확진자가 나온게 1월 20일이었다. ‘재난기본소득’이 공론화된 건 2월 하순부터다.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자체적으로 재난기본소득 지급 방침을 밝힌 게 3월이었다. 결국 정부도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이 3월 30일 제3차 비상경제회의에서 “소득하위 70% 가구에 대해 4인가구 기준 가구당 100만원”을 긴급재난지원금으로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지급대상을 둘러싼 논란 끝에 결국 당정이 전국민 보편지급으로 방침을 정한 게 23일이다. 그러는 사이에 코로나19로 일한 실직과 휴업, 폐업 등으로 고통받는 저소득층과 실업자 얘기는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다.
가장 첨예한 논쟁은 지급대상 문제인 듯 하다. 더불어민주당과 한때 미래통합당은 전국민에게 지급하자고 한다. 기획재정부와 현재 미래통합당은 소득하위 70%로 제한하자고 한다. 하지만 겉에 보이는 건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수면 아래 거대한 빙산 중심에선 재정정책을 둘러싸고 세계관과 세계관이 맞붙는 담론전쟁이 한창이다. 한쪽에는 ‘긴축’이 있다. 이들의 교리는 ‘재정건전성’이다. 반대편 변방에는 ‘적극적 재정정책’을 외치며 증세와 복지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건 단연 ‘재정건전성’이다.
재정건전성은 사실관계에 관한 문제도 아니다. 정부부채 규모를 외국과 비교해보면 한국은 OECD에서 재정건전성이 가장 좋은 축이지만 정부는 모른체할 뿐이다. 한국은 재정건전성이 지나치게 좋아서 문제이니 확장적 재정정책을 펴라고 IMF가 기회있을 때마다 권고해도 마이동풍이다. 경제관료들은 틈만 나면 “더 어려운 상황에 대비해 재정여력을 비축해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의 철학을 쉽게 풀어보면 이 정도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다. ‘미래에 언젠가 닥칠지 모를 헬조선을 막기 위해 지금의 헬조선을 방치해야 한다.’
재정건전성이라는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이들은 ‘코로나’라는 외적이 쳐들어왔는데도 군량미와 무기를 만드는데 돈을 쓰는걸 마땅찮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금송아지를 녹여 무기를 만들자는 말이 나올까 무서워 질병관리본부와 국립병원 공무원들 연가보상비까지 깎으려 든다. 이들은 국민들에게 ‘정부 의존증에 걸리는 건 노예의 길’이라며 ‘노오력’만 강조할 뿐이다. 이분들은 대체로 미국에 가서, 혹은 미국에서 나온 교과서로 경제학을 공부한 공부 잘하는 분들이다. 하지만 교과서만 너무 열심히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교과서에 나온 얘기만 읽지 말고 미국이 실제로 하는 행동을 살펴보는 데는 매우 취약하다.
국가적 위기가 닥쳤는데도 곳간 열쇠를 꽁꽁 숨겼던 사례는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독일은 ‘자본주의는 어차피 망하니 그냥 둬야 한다’는 좌파와 ‘빚지면 안된’는 우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히틀러에게 정권을 헌납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IMF가 강요했던 재정긴축과 고금리로 나라가 결딴날 뻔했다. 정작 미국은 대공황과 금융위기에서 주저없이 확장재정정책을 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파산하고 직장 잃은 사람 넘쳐나면 세금을 낼 사람이 없으니 어차피 건전재정도 불가능하다.
처음에 긴급재난지원금이 꽤 괜찮은 방식이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이유는 두가지였다. 하나는 효율성 관점에서 긴급한 지급을 통한 위기대응이고, 또 하나는 공동체와 국가에 대한 연대와 신뢰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 말마따나 “모든 국민이 고통과 노력에 대해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는데 동의한다면 재정건전성이라는 금송아지에 발목이 잡혀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다. “상상력에 제한을 두지 말라”는 말을 새겨 들어야 하는건 국민들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3월 30일 문 대통령이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속하게 집행하도록 정부는 뼈를 깎는 세출 구조조정으로 2차 추가경정예산안을 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밝힌 것부터가 혼란을 부른 첫단추, 메시지실패가 아니었나 싶다.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긴축을 주문함으로써 기재부를 위시한 재정건전성 숭배자들의 손을 들어준 셈이 됐다.
‘지출 구조조정’은 사실 역대 대통령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주문하는 식상하기 짝이없 레퍼토리다. 시작은 박정희였다. 그는 1974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소비 절약에는 정부가 앞장을 서야 되겠다. 그래서 정부는 이번에 세출 예산서에 약 500억원을 절감하여 유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만성적으로 팽창되어 온 예산구조를 영점 기준에 의하여 재점검하겠다”(1982년 10월 4일)고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3월 19일 신경제 관련 특별담화문에서 “모두 고통을 분담해 주십시오. 정부가 앞장서겠습니다. 청와대 예산을 먼저 줄이겠습니다. 각종 행사는 물론 청와대의 식탁까지도 낭비요소를 철저히 없애도록 하겠습니다. 작고 생산적인 정부가 되겠습니다. 올해는 공무원 봉급을 올리지 않겠습니다. 정원도 늘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호소했다.
세 사람은 시바스리갈과 백담사와 외환위기로 임기를 마무리했다. 우리는 그들 임기에 정부 지출이 줄었다는 어떤 증거도 갖고 있지 않다. 당연한 것 아닌가. 1년에 10%를 바라볼 정도로 경제가 성장하고 물가가 급증하고, 인구는 나날이 늘어나는데 정부지출을 줄인다는 발상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0년 제11차 라디오연설에서 “10% 예산 절약을 목표로 정부 조직도 줄이고 씀씀이도 더 효율적으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취임 초기에는 증세에 대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2월 27일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공약재원 마련을 위해) 요즘 증세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국민세금을 거둘 것부터 생각하지 말라. 먼저 최대한 낭비를 줄이고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등의 노력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장은 “50년에 걸친 ‘허리띠 졸라매기’는 돈 쓸 곳은 많은데 세금 인상은 피하려는 정권의 태도에서 나온 면피성 성격이 강하다”면서 “그러다 보니 정권이 바뀌어도 매번 세금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정신개혁운동 측면으로 접근하곤 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2006년 1월 18일 신년연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정 소장은 말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여론조사를 해 보아도 세금을 올리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껴 쓰고 다른 예산을 깎아서 쓰라고 합니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정책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며 증세 문제를 꺼냈다.
문 대통령이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선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 연설문집>이 아닐까 싶다.
<2017년 11월 4일자, 2020년 4월 24일자로 썼던 서울신문 기사를 바탕으로 수정 보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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