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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에서 극단으로, 북한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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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북한민주화운동에 대한 단상
2004/11/24


 지난 23일 자유주의연대가 창립식을 열고 "우파혁명" 외쳤다. 자유주의연대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세력은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으로 참여하는 홍진표, 최홍재 등 북한민주화운동론자들이다. 이 글은 북한민주화운동론자들을 취재하면서 느낀 개인적 심경을 쓴 글이다. 아울러 이 글은 인권연대 소식지에 기고했던 글임을 밝힌다.


시작은 “시대가 바뀌면 시대정신도 바뀌어야 한다”는 화두였다. 그 후 7년 정도가 흐른 지금은 “김정일 정권 타도를 통한 북한민주화운동”이다. 그 끝은 어디일까?

98년 4월쯤으로 기억한다. 군대를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너무나 바뀌어 버린 사회에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제대 직전 김금수 선생(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은 내게 “제대하면 고민을 많이 해야 할거다. 밖은 시대가 엄청 많이 바뀌었다”고 경고(?)했는데 과연 농담이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한총련은 풍비박산이 나있고 과에서는 학생회장 후보조차 없었다. 이건 아닌데... 하는 답답함 속에서 나는 자연스레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 나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던 글이 바로 “시대가 바뀌면 시대정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글이었다.


시대정신과 새로운 운동, 그게 북한민주화운동이었나?

과거 강철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졌던 김영환씨가 한청협 기관지였던 <시대정신>에 기고한 이 글은 당시 ‘시대정신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상당한 충격을 줬던 것으로 알고 있다. 김영환씨의 글이 나오고 다음 호에 정대연 민중연대 정책위원장이 ‘시대가 바뀌어도 시대정신은 바뀌지 않는다’는 반론문을 실었고 김영환씨는 다시 재반론문과 ‘시대정신문답’을 발표했다.

고백하건데 나는 당시 김영환씨의 글에 상당한 호감을 가졌다. ‘운동의 변화’라는 절박한 문제제기에 대해 김영환씨는 나름대로 상당한 고민의 흔적을 보여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만난 선배 한 명도 비슷한 얘기를 나에게 들려줬다. 사회운동에서 일하다 고민 끝에 새로운 시민단체 간사로 일하게 된 그 선배는 나에게 새로운 운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많이 들려줬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공동체운동 재발견, 시민들에 기반한 느리지만 꾸준한 작은 활동, 한총련의 무모한 노선에 대한 비판, 북한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 등이었다.

99년이 되면서 나는 대학원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고 운동에 대한 고민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런데 얼마전 시민단체에 있는 선배들과 술자리에서 나는 ‘북한민주화운동’에 대한 세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단편적으로 존재하던 기억들이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다. 나에게 운동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설파하던 그 선배도 북한민주화운동에 상당히 관여하고 있다는 얘기도 그 자리에서 들었다

올해 2월10일 송두율 교수 공판에 검찰측 증인으로 홍진표씨가 나왔다. 그는 “89년 당시 북한바로알기 운동에 송두율 교수가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졸지에 송두율 교수를 한국내 주사파의 대부로 만들어버렸다.

그 말이 거짓이라면 홍진표씨는 허위증언을 한 것이고 사실이라면 홍진표씨가 운동가로서 최소한의 의리도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들이 총체적 반성 끝에 북한민주화운동에 나섰다고 강조했다. 왜 그런 반성을 월간조선 지면에, 국정원 조서에, 검찰측 증인으로 해야 하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솔직히 그 선배와 송 교수 공판에서 본 북한민주화운동이 다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시민의신문> 11월1일자 북한인권 기획특집을 준비하면서 만난 그 선배는 북한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 선배에게 물었다. “형은 저에게 새로운 운동에 대한 고민을 말했잖아요. 북한민주화운동이 형이 얘기했던 새로운 운동인가요? 김정일 정권을 타도하면 누가 만세를 부르며 좋아할까요?”


극단에서 극단으로 흐르는 북한민주화운동

북한민주화운동론자들은 “20세기 진보로 21세기 진보를 재단하지 말라”고 말한다. “진보운동을 자처하는 한국 시민사회운동은 타락했다”는 말과 함께. “공동체 운동이라는 새로운 진보개념”을 들고 나오는 그들은 북한 민주화를 그 첫단추로 여기는 듯하다. 방법은? “김정일 정권 타도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란다. “김정일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엄청난 기근이 닥쳤다. 당시 세계 곳곳에서 구호물자를 보냈다. 심지어는 미국의 재벌기업까지도. 거의 유일한 반대자는 레닌이었다. 그는 “자본가들이 보낸 구호품이 러시아 인민들의 혁명의지를 갉아먹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종종 너무나 분명한 목표의식에 파묻혀 세계의 다양한 모습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있다. “계승하자 항일무투”를 외치며 “수령님의 영도아래 자주의 한길로 가는 사회주의 조국”을 흠모하던 운동가들이 이제는 모 아니면 도 식으로 “김정일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금강산사업까지도 반대한다.

그들 말대로라면 ‘김정일 수령절대주의 독재정권’이 식량을 팔아서 무기를 사들이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식량지원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불행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미제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친미로 망한 나라 반미로 되살리자”를 외치던 이들이 이제는 “북한인권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부시정책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김정일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를 너무나 미워하다보니 ‘적군의 적군은 아군’이 된 것인가? 아니면 ‘아군의 적군은 적군’이 된 것인가. 그들이 외치는 북한인권에는 인권이 없다. 오로지 적개심만 있을 뿐이다.

취재를 위해 탈북자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탈북 7년째인 박술희씨(가명)는 “후세인 정권 무너졌다고 이라크 사람들이 행복해졌느냐?”며 “김정일 정권이 무너진다고 북한 주민들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묻는다. 북한민주화운동이 진정으로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전쟁공포에서 벗어날 인권, 굶어죽지 않을 인권을 갖도록 도와주는 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좋은벗들이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장마당 허용, 이동권 보장’을 선결과제로 내세운다. 장마당에서 장사를 해서 식량을 구하고 그러려면 다른 지역을 이동할 권리가 필요하다는 생존권 차원의 요구인 셈이다.

지난 8일자 <시민의신문>에 ‘북한인권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과 이광백 시대정신 편집장의 대담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에 대해 아이디 ‘참새’라는 분이 쓴 댓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부족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과거 맹렬한 주사파들이 언젠가부터 맹렬한 반김정일파로 돌아선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극적이다. 그들은 과거나 현재나 절대성에 대한 믿음은 한결 같아 보인다. 그들은 인민을 굶겨 죽이는 김정일 정권에 대해 침묵하는 남한 사회운동을 비겁하고 위선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은 과거 사회운동의 함정에서 조금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절대를 사랑한 사람들…

그들은 수시로 반성문을 쓴다. 최근 어느 집회장에서도 썼다. 그렇게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반대로 바꾸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반성문이 필요할 것도 같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반성했다는 말인가. 대북인식? 그들은 부속품 하나 바꾸고 다시 나와서 목소리를 높인다. 금속성의 목소리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과거의 사회운동이 변해야 한다는 명제는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방향을 잘못 잡았다. 차라리 180도까지만 돌아야 했다. 그들은 너무 돌았다. 그들은 한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현재 자신들이 서있는 위치를 알고 있을까. 그들은 문제의 핵심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북한을 민주화하겠다고 나서기 전에 자신들의 그 절대 친화성부터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2004년 11월 24일 오후 12시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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