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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8. 23:44

내가 겪은 복지부: 복지공약이 사라졌다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를 담당하기 시작한 게 2013년 5월이었으니 벌써 반년이 됐습니다. 모르는 게 지금도 많지만 조금씩 분위기 파악해 가는 중입니다. 다음 달에는 복지부가 세종시로 이전합니다. 걱정했던 주말부부 신세는 면했습니다만, 일주일에 몇 번은 새벽 6시 반에 출퇴근 버스를 얻어 타야 하는데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복지부를 들여다보게 되면서 상당히 놀랐던 건 ‘복지국가’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진 복지부 관료들을 만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일단 ‘복지’보다는 ‘보건’ 쪽이 선호부서라는데 그렇다고 공공의료가 강하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보건산업이 더 떠오르는 부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보건산업은 (여전히 아무도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창조경제 핵심 분야이기 때문인 듯합니다.


후진국 병 '결핵' 줄이겠다더니

사례를 하나 들어 보이겠습니다. 한국은 전형적인 ‘후진국 병’이라는 결핵 발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평균보다 8배나 많죠.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복지부는 올해 3월 ‘제1기 결핵관리 종합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인구 10만 명당 100명(2011년 기준)인 결핵발생률을 2020년까지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공언했지요. 당초 계획한 내년도 예산규모는 837억 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 규모는 365억 원으로 전년 수준에 그쳤습니다.



해마다 증가 추세인 '후진국 병' 결핵


어느 정부부처나 그렇지만 “기재부 때문에” 예산반영이 제대로 안 되는 측면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복지부가 국민의 건강권을 얼마나 고민하느냐 하면 솔직히 의문입니다. 공공의료와 사회적 약자 의료비지원 관련 예산보다는 일부 병원과 기업들에만 혜택이 돌아가는 의료 해외진출과 해외환자유치에 예산은 대폭 늘었다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공공의료 예산은 줄고 해외진출 예산은 늘고

가령 지방의료원을 비롯한 공공의료 관련 사업을 보지요. 국회가 여야 합의까지 도출했던 공공의료 정상화 국정조사까지 했으니 복지부가 더 열심히 뛰어다닐 법도 한데 실상은 그렇질 않습니다. 지방의료원 관련 예산안 규모는 662억 원으로 올해 647억 원보다 15억원 늘어나는 데 그쳤습니다. 그나마 34개 지방의료원 기능보강은 4억 원 증가에 불과하고 5개 적십자병원 기능보강은 되레 38억 원이 줄었죠. 서울시가 9개 시립병원에 지원하는 예산이 올해 512억 원이라는 것과 비교하면 민망할 따름입니다.




해외 진출 관련 사업 예산만 대폭 증가했다
내년도 주요 보건의료 부문 예산안 현황 (단위: 억 원)
* 복지부 응급의료과에서는 '응급의료 이송체계지원' 예산안이 보고서 발간 이후 14억원에서 16억원으로 조정됐으며, 증감액도 -3억원이라고 알려왔다


국립중앙의료원은 정부출연금 삭감에 따라 내년도 운영지원비가 50억 원(20%)이나 삭감됐습니다. 각종 의료혜택 사각지대에 있는 외국인근로자 등에게 의료비를 지원하는 ‘외국인근로자 등 의료지원’ 예산도 올해 28억 원에서 23억 원으로 16.9% 깎였고요. 심지어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국가재정운용계획 2013~2017’을 보면 보건의료 부문 예산규모는 연평균 3%씩 줄어들 계획입니다. 보건·복지·고용 분야에서 예산 규모가 줄어드는 것은 보건의료 부문이 유일합니다.



유일하게 예산이 줄어든 '보건의료'
국가재정운용계획 2013~2017 (출처: 대한민국 정부)


빈발하는 다제내성균, 이른바 슈퍼박테리아 관련 소식에서 보듯 한국은 결코 감염병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정작 감염병 관련 예산은 역주행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감염병 관련 11개 사업을 분석해 보니 내년도 예산 규모가 평균 9% 감소했습니다. 신종 감염병에 대비한 입원치료병상 확충유지 사업의 예산규모는 2009년 66억 6100만원, 2010년 67억 2000만원이었지만 2011년 12억 6000만원, 2012년과 2013년 각 14억4000만원으로 급감했습니다. 거기다 내년에는 11억 7800만원으로 올해 대비 18.2%나 감액됐다. ‘신종감염병 국가격리시설 운영’ 예산도 올해 11억 2900만원에서 내년에는 9억 7100만원으로 14% 줄었습니다.


그럼 보건산업과 의료 해외진출 관련 예산은 어떨까요. 올해 63억 원에서 내년도 215억 원으로 239%나 증가한 ‘글로벌헬스케어 활성화’를 보면 ‘서울지역에 ‘글로벌 인재양성센터’란 이름으로 교육용 건물 매입에 150억 원이나 책정했습니다. 복지부는 교육 대상자가 대부분 수도권 병원에서 일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교육인력 확대를 위해 전용교육장 건물을 매입할 예정이랍니다. 하지만 예정지는 물론 구체적인 활용계획도 없는 상태입니다.


복지국가와는 멀어지는 보건복지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했습니다. 누구 할 것 없이 전반적으로 보건복지부의 위상이 복지국가 지향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보건은 보건산업부에 가까워 보이고 복지는 지방 이양과 국고보조방식을 통해 부담과 책임은 지방에 떠넘기고 생색만 내는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주 듭니다. 이런 와중이니 ‘복지지출보다 재정 건전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복지부 장관 후보자까지 등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복지국가는 복지지출확대를 전제로 합니다. 그것도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많이 늘려야 한다고 하지요. 당연히 재원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복지국가 실현에서 핵심 논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복지정책 확대를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지요. 이명박이나 오세훈이 내세웠던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은 그중에 저급한 쪽에 속하고요. 좀 더 그럴듯해 보이는 건 ‘재정 건전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흥청망청 빚내다가 집안 거덜난다며 가계부채와 정부부채를 동일시하는 비유를 곁들이면 금상첨화죠.


말도 안 되는 '재정 건전성' 타령

대통령도 그렇고 기재부도 그렇고 기초연금도 그렇고 각종 복지정책을 얘기할 때 재정 건전성을 기준에 놓고 얘기하는 경우를 자주 듣습니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느냐 하면,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한 박사가 까칠하게 표현한 얘기로 대신하겠습니다.


“재정 건전성만 놓고 보면 젊어서 열심히 세금 내고 환갑 되기 전에 죽는 게 제일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대공황이나 미국발 세계금융위기를 보면 재정적자를 ‘만악의 근원’처럼 여기며 재정 건전성을 지키려는 시도가 오히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대공황이 터지자 미국 영국은 물론 세계 모든 나라가 처음엔 긴축정책을 폈습니다. 재정 건전성 때문이죠. 하지만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본질은 재정적자가 아니라 민간 소비위축과 양극화였기 때문입니다.


대공황 극복은 적극적인 재정지출과 민간 소비 활성화 유도를 통해 가능했죠. 뉴딜정책이 바로 그런 종류였고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한 원동력 역시 국제통화기금(IMF)이 강요했던 재정 긴축과 고금리가 아니라 적극적인 재정지출과 금융완화 덕분이었고요.


복지부 장관 후보 문형표 "복지지출 늘리는 것 능사 아니다"

박근혜가 새 복지부 장관 후보자로 내세운 문형표는 오랫동안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일한 학자입니다. 그가 2006년 한 경제지 기고문에 쓴 글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재정 건전성을 최우선으로 강조하는데다 복지지출 확대에 거부감을 갖고 있죠.


“과다한 복지부담은 근로의욕의 축소, 기업의 고용 회피 등으로 경제성장에 저해요인이 될 수도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무조건 복지지출을 늘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문형표, 2006년 한 경제지 기고문 중에서)


재정건전성에 좋지 않다며 복지지출 확대도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긴축을 위한 복지지출통제’를 소신으로 견지하는 학자를 복지부 장관으로 앉히겠다는 것은 복지정책을 ‘경제개발’ 정책에 종속시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정부 복지정책의 큰 그림은 복지확대에서 완전히 멀어져 버렸습니다. 작년 대통령 선거에서 내놓았던 각종 복지공약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에 처했습니다.


박근혜 시정연설... 뒤로 완전히 밀린 복지의 꿈

바로 오늘 박근혜는 국회 시정연설을 했습니다. 연설문 전문에서 '복지'는 딱 다섯번 나옵니다. "고용복지", "복지 패러다임", "복지 예산을 확대편성", "복지 누수", "예술인복지법"입니다. 고용복지는 중소기업 성장을 위한 수단이고, 예술인복지는 문화산업 융성을 위한 기반 차원입니다. 복지에 대한 제대로 된 언급은 다섯 문장에 그칩니다. 경제부흥이나 창조경제, 외국인투자유치, 규제완화 등과 비교하면 완전히 뒤로 밀렸습니다. "복지국가는 아버지의 꿈"이라는 말이 다 민망합니다.


"정부는 복지 패러다임을 국민 개개인에게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는 생애주기별 맞춤형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이렇게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는 내년도 복지예산을 확대 편성하였습니다... 앞으로 부정 수급 등 복지 누수를 철저히 방지하고 서비스기관 간 칸막이를 없애 편리하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겠습니다. ..노후가 불안하지 않고, 질병과 가난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 되어야 국민행복시대의 토대가 구축될 것 입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어르신들의 생활 안정과 국민들의 노후 안정을 위해 내년 7월 기초연금제도 도입을 목표로 예산 5조 2천억 원을 반영하였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 2013년 11월 18일 시정연설 중에서


이와 관련해 특히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시정연설 중에 밝힌 “의료, 교육, 금융, 관광 등 부가가치가 높은 서비스업에 대한 규제를 과감하게 풀어나갈 것입니다”란 부분입니다. 의료를 서비스업 가운데 하나로 위치 짓고 규제 완화를 강조한다? 이것이 지향하는 건 어디일까요. 바로 앞 문장에 나오는 “제조업, 입지, 환경 분야 중심으로 추진되어 온 규제 완화를 전 산업 분야로 확산해 투자 활성화의 폭을 넓혀가려고 합니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말해, 의료 관련 규제를 완화해 해외투자를 활성화하겠다는 것이지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의료영리화 정책 근거”(우석균) 

이 목표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법안 하나가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습니다. 기재부가 정부입법으로 발의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의료와 교육 등 제조업을 제외한 모든 분야를 서비스산업으로 규정짓고 기재부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서비스산업선진화위원회가 관련 정책을 결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1월13일 김용익 김현미 두 민주당 의원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보건의료계는 기재부가 보건의료 분야를 서비스산업으로 포함시킨 뒤 복지부 반발을 무력화시켜 영리병원 허용과 외국투자병원 도입 등 기재부 숙원사업을 밀어붙일 수 있다는 점을 한목소리로 우려했습니다. 이 법안이 왜 그렇게 문제일까요. 이 토론회에서 주제발표를 맡은 우석균(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이 한 발언에서 그 이유가 잘 드러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서비스산업 발전을 명분으로 의료영리화 정책을 추진할 근거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비스산업선진화위원회를 통해 직접 관련 부처의 정책 사안이나 법령을 개폐할 수 있는 권한까지 기재부에 부여한다는 점에서 ‘기재부 독점법’이나 다름없다.”


한마디로 국민들은 뒤통수 제대로 맞았습니다. 더 걱정되는 건 이대로 가다가는 뒤통수 뿐 아니라 눈 뜬 채 뺨 맞을 것 같다는 겁니다. 복지부에게는... '자업자득'이란 표현이 떠오르는군요.


이 글은 기존에 썼던 아래 두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아울러 슬로우뉴스에 기고한 것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공공의료 예산은 줄고, 보건산업 예산은 껑충

복지보다 재정건전성을 더 걱정하는 복지부장관 후보자

감염병 대책 관련 내년도 예산 대폭 삭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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