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연산군이 뉴스에 오르내린다. “연산군도 하지 않은 사초 폐기”라며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대화록)을 폐기했다고 노무현을 비난한다. 한때 역사학자를 장래 희망으로 삼았던 사람으로서 '사초(史草)'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사초’가 뭔지나 알고 떠드는 거냐고 비웃어주지 않으면 잠이 안 올 것 같아 몇 자 적기로 했다.
이극돈 뇌물수수 기록한 사초로 비롯된 무오사화
연산군 4년, 그러니까 1498년에 사화(士禍), 지금으로 치면 공안사건이 일어났다. 유자광과 이극돈 등 대신들이 김일손이라는 사관이 쓴 사초를 문제 삼으면서 시작됐다. 사초 때문에 발생한 사화였기 때문에 ‘무오사화(戊午史禍)’로 표현하기도 한다. 수많은 신하가 무고하게 사형을 당했다. 이미 죽은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 부관참시했다.
조선 시대 사관은 궁중에 교대로 숙직하면서 조정 행사와 회의에 모두 참석해 일종의 속기록을 작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초다. 김일손은 ‘성종 상중(喪中)에 당상관인 이극돈이 기생과 어울린 일과 뇌물을 받은 일’을 사초에 썼는데 공교롭게도 성종 사후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사국(史局)에서 이극돈이 그 기록을 보게 된다. 물론 공식적으로 문제가 된 건 물론 개인에 대한 일이 아니라 연산군의 정통성을 훼손했다는 의혹이었다.
김일손은 자기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란 글을 사초에 삽입했다. 꿈에 나타난 초나라 의제(회왕)를 조문한다는 내용이다. 이극돈과 유자광은 이 글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세조를 비난한 것이라고 해석하며 물고 늘어졌다. 초나라 의제는 항우 손에 죽었는데, 김종직은 사실 단종을 의제에 빗댄 것이라는 트집이었다.
보고를 받은 연산군은 김일손이 쓴 사초를 모두 들여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사초는 법적으로 사관 이외에는 임금이라도 볼 수 없게 돼 있다. 이 때문에 이극돈까지도 사초 열람만은 안된다고 반대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고집을 꺾으면 연산군이 아니다. 연산군이 계속 고집을 부리자 결국 연산군이 살펴볼 만한 곳을 가려 올리겠다고 하고는 여섯 곳을 뽑아 올렸다고 한다.
요양 중이던 김일손이 잡혀 와 국문을 당하고 사건은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 여파로 사초에 '조의제문'의 저자인 김종직은 이미 죽은 시신을 부관참시당했고, 그 부인을 관노비로 보내졌으며, 김종직 제자들이 조정에서 씨가 마를 정도로 처벌을 받았다. 김일손은 극형에 처해졌다.
여기까지 역사적 사실을 살펴봤다. “연산군도 하지 않은 사초 폐기”가 들어설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연산군도 겨우 했던 사초 열람' 혹은 '연산군도 금하지 못한 사초 폐기'라고 하는 게 사실에 부합하겠다.
조선 시대 사초는 실록을 편찬한 뒤에는 자하문 밖 세검정 차일암에서 물에 빨아 내용을 모두 없애고, 종이는 재활용했는데 이걸 세초(洗草)라고 한다. 혹시라도 사초 내용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제도적 뒷받침 덕분에 사초 때문에 정국에 파란을 이 일어난 것은 조선왕조 500년에 연산군 당시밖에 없었다.
'완성본'이 있는데 폐기? 실종?
기자가 쓴 기사 초고는 데스크와 교열을 거친다. 초고와 최종 기사는 같을 수도 있고 일부가 다를 수도 있고 아주 많이 다를 수도 있다. 기사를 출고하고 나서 초고를 삭제했는데 나중에 왜 초고를 삭제했느냐고 하면 도대체 뭐라고 답해야 할까. 심지어 ‘초고가 출고 기사보다 더 완성도가 높다’고 말하는 정도가 되면 이건 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 될 것이다.
같은 논리를 학자들한테도 적용할 수 있다. 논문을 완성한 뒤 중간작업문서를 삭제했다는 이유로 논문심사에서 떨어졌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백 보를 양보하더라도 완성본은 분명히 봉하 e-지원에도 있고 국정원에도 동일한 게 있고, 그게 완성본이라는데, 어딜 봐서 ‘폐기’니 ‘실종’이니 하는지 일반인 머리로는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다.
대통령 재임 시절 나는 노무현을 참 싫어했다. 이라크 파병부터 시작해 한미FTA로 이어지는 데 넌더리를 냈다. 아마 당시 대통령 국정수행 긍정평가 여론조사를 하는 전화가 내게 걸려왔다면 주저 없이 가장 낮은 점수를 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단 한 가지, 기록관리만은 업적으로 인정해주고 싶었다.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역사에서 노무현의 절반만큼이라도 기록관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록관리 정착을 위해 노력한 대통령은 아무도 없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도 그런 노력에서 나온 기록물이었다. 하지만 그 기록물 때문에 노무현은 죽어서도 편할 날이 없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노무현이 참 불쌍하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금도라고는 없는 후임들 만난 죄, 더 정확하게는 정권 재창출을 못 한 죄, 무엇보다 미덥지 못한 친구들을 ‘친노’로 둔 죗값을 죽어서 치르고 있다.
기밀문서 악용하고 부관참시 수단으로 삼는 나라
용비어천가는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구절로 시작한다. 적어도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런 제도적 장치(공식적으로 그리고 비공식적으로)를 갖춘 나라였다. 세종 당시 조정에서는 사초를 관리하는 규칙을 두었는데 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사관이 자신과 관계된 일이라 하여 꺼리거나, 친척이나 친구의 청탁을 듣거나 하여 흔적을 없애려고 사초를 훔치거나 위조·변조한 자, 사초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한 자는 사형에 처했다. 이는 사초 자체를 임금이 내린 교서에 준하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어떤가. 역사에 자동적인 진보는 없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정 최고 의결기구인 국무회의도 껍데기 회의록만 있고, 약속한 속기록은 만들지도 않는다. 조선 시대 식으로 말하면 국무회의 사초가 없는 셈이다. 기껏 만든 기록물도 풀어헤쳐 부관참시 수단으로 삼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아무리 봐도 국익과 관련된 국가기밀문서를 공개석상에서 떠들고 다니고 정치에 악용했는데도 처벌은커녕 제재도 받지 않는다. 대통령은 ‘정부3.0’을 강조하고 현실에선 '마이너스 3.0‘을 향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기록관리라는 기준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아주 뿌리가 얕은 나라다.
그래서 이 나라에선 바람잘 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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