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개발원조(ODA)를 선진화한다며 정부가 중장기계획을 대대적으로 발표한게 2010년이었다.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제개발협력위원회가 부처 합동으로 발표했다. 당시 정부는 비구속성 원조 비율을 2015년까지 75% 수준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하면서 국제사회에 약속했던 내용이기도 했다. 현재 한국은 대외원조 가운데 구속성원조 비중이 여타 DAC 회원국 평균에 비해 두 배 가량 많다.
구속성 원조란 수원국이 조달하는 수입물자, 용역의 조달처를 공여국 혹은 일부 소수국가로 한정하는 원조를 말한다. 그러한 제한이 없는 원조를 비구속성 원조라 한다. 2010년 기준 비구속성원조비율은 한국이 43.5%로 OECD/DAC 평균 84.5%의 절반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
기획재정부가 민주통합당 의원 정성호에게 제출한 '대외경제협력기금 2012년도 운용계획안 설명자료'에 따르면 2012년도 대외경제협력기금 규모는 2011년도 7375억원보다 562억원, 7.6% 감소한 6813억원을 기록했다. 특히 '2011-2012년도 구속성 ODA 사업 목록(EDCF 관련 사업)' 자료를 보면 기획재정부가 2011년 7월부터 2012년 8월까지 승인한 대외경제협력기금 사업 중 구속성원조 사업은 1조 5109억원이었으며, 이 가운데 토건사업 비중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절반 이상이나 됐다.
이는 저개발국 지원이 국내 토건세력에게 대규모 이익을 안기는 것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우려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아울러 구속성원조 비율이 여전히 한국 ODA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토건세력 밥그릇 챙겨주기와 연관된 것은 아닌지 진지한 토론이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사업규모가 500억원이 넘는 것만 해도 몽골 국립의료원 건립사업(636억원), 방글라데시 다카 상수도 개발사업(516억원), 베트남 롱수옌시 하수처리사업 528억원, 캄보디아 21번 국도 개보수사업(603억원), 콩고민주공화국 렘바임부 상수도사업(779억원), 탄자니아 잔지바르 관개시설 개선사업(573억원), 파키스탄 말라칸트 터널 건설사업(894억원), 시에라리온 프리타운시 복합행정센터 건립사업(630억원) 등이다.
이밖에도 볼리비아 디오스강 교량 건설사업 490억원, 베니강 교량 건설사업 351억원, 온두라스 촐루테카 병원 건립사업 379억원, 아제르바이잔 직업훈련센터 건립사업 252억원 등 수백억대 토건사업이 진행중이다.
대외경제협력기금 2012년도 세출총괄표
단위: 백만원
사정이 이런데도 10월10일자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아예 대놓고 대외경제협력기금(EDCF)를 국내 건설사 이익증대에 복무하도록 길을 열어주겠다고 나섰다. 범정부 차원의 중장기계획이 나온지 2년도 안돼 중장기계획에 핵심으로 참여했던 부처가 말을 바꾸는 행태를 보이는 셈이다. 기사 제목은 "대외경제협력기금으로 건설업계 숨통"이라고 돼 있다. 난 이 기사를 보고 숨이 탁 막혔다.
한국은 구속성원조 비중이 너무 많다는 지적을 예전부터 받았다. 2009년 6월 한국을 방문한 DAC 사무국 실사단장 Karen Jorgensen은 비구속성 원조 확대가 DAC 회원국간 장기간에 걸친 합의 노력 끝에 세운 목표이기 때문에 협상 불가능한 쟁점임을 강조한 바 있다.
기획재정부 얘기와 달리 구속성원조는 효과성 자체만 놓고봐도 썩 좋은 정책대안이 못된다. DAC 한국 특별검토보고서(2008년)에 따르면 구속성 원조는 원조효과를 약화시키며 평균 약 15~30%의 원조 비용을 상승시켜 비간접적 행정비용을 초래하고 상업적 고려에 따르게 되므로 협력대상국의 수요와 불일치하는 측면이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이계우,박지훈은 '한국 공적개발원조 20년의 평가'(한국개발연구 제100호, 2007)에서 1999~2003년 사이 한국의 ODA가 수원국에 대한 한국의 수출증대 효과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수원국에 대한 직접투자가 증진됐다는 근거도 없다고 밝혔다. 이는 구속성원조의 주요 동기가 수출증대 등 경제적 실리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효과는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에 따라 정부도 2008년 1월 비구속성 원조 비중 확대 로드맵을 발표한 적이 있을 정도다.
머리따로 손발따로 공적개발원조 난맥상이 초래한 삽질정책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공적개발원조의 머리와 손발이 완전히 따로 놀기 때문이다. 총괄 따로, 정책 따로, 집행 따로. 이게 바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변신했다고 자화자찬하는 한국 공적개발원조의 맨얼굴이다. 국무총리실과 외교통상부, 기획재정부가 저마다 부처간 입장만 내세우는 통에 공적개발원조가 ‘배가 산으로 가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 공적개발원조는 명목상 총괄단위인 국제개발협력위원회가 있다고는 하지만 애초 법취지와 달리 유명무실한 부처간 협의회에 그치고 있다. 실질적인 공적개발원조 정책은 외교통상부(무상원조)와 기획재정부(유상원조)로 양분돼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총괄이 안되다보니 부처별, 자치단체별로 너도나도 전시성 사업을 벌이는 형국이다.
ODA 추진체계 (국회예산처 09 ODA사업평가, 7쪽)
ODA 관련 주요 조직 현황 (국회예산정책처, 2010. 47쪽)
ODA 사업 추진 체계도 (국회예산정책처, 2012년도 예산안 중점분석2)
중구난방 원조체계로 인한 문제점은 무엇일까. 첫째, 원조 전반의 일관성을 저해한다. 국회예산정책처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에 종합병원 건립을 지원하는 사업이 일부는 유상으로, 일부는 무상으로 지원한 사례가 있었다.
둘째, 효과성과 효율성 저하와 기회비용 증가가 발생한다. 가령 개도국 인사를 초청해 연수를 제공하거나 전문인력을 파견하는 사업이 행정안전부, 정보통신위원회, 국제협력단 등에서 각각 수행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셋째, 국회의 감시와 예산 심의의결에서도 비효율이 발생한다. 유상원조에 대해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무상원조에 대해서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감독하는 실정이다. 국회 두 위원회가 합동으로 국제개발협력에 관해 통합적으로 논의하고 감시 평가하는 제도적 틀이 없다 보니 ODA를 국회차원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하지 못하는 문제 발생한다.
넷째, 수원국(원조를 받는 국가) 입장에서도 자국 내 사업추진에 혼선이 발생한다. 가령 중국 사막화방지사업처럼 국제협력단과 산림청 등으로 지원기관 달라 협의경로를 일원화할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다섯째, 사업관리 측면에서 부실화를 유발한다. 각 부처는 일반조직과 인력을 사업을 수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전문성과 경험이 부족해 사업 전반이 부실해진다.
2012년도 예산의 경우를 보자. 2012년도 ODA예산안 1조 9080억원. 기획재정부 38.7%(7386억원), 외교통상부 49.5%(9446억원) 차지. 기획재정부에는 국제개발금융기구 출연출자금 5.3%(1020억원)와 대외경제협력기금 33.4%(6366억원). 외교통상부에는 UN 등 국제기구 분담금 24.0%(4577억원), 코이카 25.5%(4869억원) 등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주무부처인 기획재정부와 외교통상부를 제외하고도 교육과학기술부 684억원, 농림수산식품부 310억원, 보건복지부 308억원, 행정안전부 214억원 등 26개 부처가 ODA 예산 중 11.8%를 담당한다.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덤벼드는 꼴이다. 그나마 국토해양부, 여성가족부 등 19개 부처는 100억원 이하 소규모로 ODA예산안 편성했다.
정부 부처별 ODA사업 예산 현황 (국회예산정책처, 2012년도 예산안 중점분석2, 160쪽)
이게 왜 문제일까. ODA 별도 예산이 아닌 부처 자체 예산으로 소규모 사업을 할 경우 장기적인 관점에 따른 전략적인 에산배분이 아니라 세미나, 초청연수, 교류 등 일회성 사업에 치우치는 경향이 나타난다. 가령 초청연수사업은 한국국제협력단에서 기존에 하는 연수생초청사업과 중복 가능성 높다. 한국국제협력단은 국내초청연수를 위한 종합연수시설까지 운영중인데 말이다. 부처 자체 초청은 대부분 1주일에서 2주일 이내에 이뤄지기 때문에 개도국 개발에도 큰 도움이 안된다.
내가 생각하는 공적개발원조 정책대안
이제는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국가전략에 입각해 공적개발원조 정책을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해야 할 때라고 본다. 내가 생각하는 방향은 공공외교 전반을 총괄하는 장관급 부처 혹은 위원회가 한국국제협력단과 국제교류재단, 해외문화홍보원, 대외경제협력기금, 아리랑TV 등 유상원조, 무상원조, 해외홍보 등 공공외교 관련 조직들을 산하로 통합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공공외교는 힘을 앞세운 강제력이 아니라 미덕(美德)과 지도력, 매력을 통해 상대방 국민의 ‘이해와 공감’을 획득하는 21세기형 외교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외교가 외교관들과 외교관, 정부와 정부의 관계만 있었다면 공공외교에선 민간과 정부, 정부와 민간을 모두 포괄하는 외교로 개념을 확장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출범을 즈음해 미국의 초당파적 ‘소프트파워위원회’가 제시한 5대 전략목표 가운데 세 번째가 공공외교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공공외교라는 기준에서 ODA를 재구성한다면 ODA의 문제가 정확히 보인다. 바로 장기적 전략이 없이 조급하게, 중구난방으로 단기적 경제적 이익만 좇는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성호 의원에 따르면 선진국에선 이미 10년 넘게 유상원조가 아닌 무상원조, 구속성원조가 아닌 비구속성 원조로 기본 방향을 정립하고 있다. 한국은 현재 GNI 대비 ODA 비중이 2010년 0.12%로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평균(0.32%)의 3분의 1밖에 안되고, 구속성 원조 비율은 43.5%로 DAC 평균(84.5%)의 절반에 불과하다.
정성호 의원실에 따르면 주요 선진국들은 양보다는 질을 높이기 위해 독립된 장관급 부처를 중심으로 원조 정책과 집행을 통합하는 움직임도 가속화되는 실정이다. 일본이 2008년부터 일본국제협력단(JICA), 외무성, 각종 ODA 부서, 일본국제협력은행을 단일화시켜 JICA가 기술협력, 무상과 유상 원조 지원을 총괄하고 외무성이 원조정책 수립을 담당하도록 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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