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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4 14:43

“이 땅이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라고?” (2004.8.6)




[단독보도] 자치단체 뒷짐에 주민은 무단점유자 낙인
일제법인소유 토지 확인 르포
2004/8/6

“조선총독부 소유 땅이 아직도 남아있다니, 그게 사실이야?” 남아있다. 대법원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전국 토지 등기부등본을 끈기있게 열람하면 심심치않게 조선총독부는 물론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기관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등의 일본인 소유 땅이 실제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약 9천1백60만㎡에 달하는 제법 큰 규모다. 
 
광복이후 전쟁과 압축경제개발 시대를 거치며 토지관리가 제대로 안됐을 것이라고 이해심을 최대한 발휘하려해도 상식적으로 수긍하기 힘든 사실이다. 일제잔재청산을 외치면서 정작 발딛고 서있는 땅은 법적으로 일제의 땅임을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알면서도 처리 못한다”
 
기름진 호남평야에서 생산한 쌀을 경성으로 신속히 운반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1번 국도에 인적한 충남 논산시 연산면 백석리. 지금은 완만한 능선이 그림처럼 이어진 한적한 시골마을이지만 폐허가 된 정미소의 규모를 보면 예전엔 상당한 영화를 누린 농촌마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동네 입구 어귀에 자리잡은 백아무개씨(70)의 집은 지난해까지 토지등기부등본상 ‘동척’이 소유자였다.
 
중앙 정부기관의 지적에 따라 논산시는 지난해 백씨에게 1백42㎡의 대지 매입을 종용해 현재는 백씨의 소유다. 그런데 백씨는 이미 지난 82년 정부의 특별조치에 따라 ‘증여’ 형식으로 지난해 매입한 땅에 붙어있는 1백85㎡의 대지를 인수받았다. 총 3백27㎡의 대지를 2차례 걸쳐 매입함에 따라 일제소유 국유지의 무단점유자란 딱지를 뗀 것이다.
 
이를 되짚어보면 논산시는 점유자였던 백씨가 82년 대지 일부를 매입할 당시 나머지 땅은 여전히 일제소유 대지 점유임을 알았음에도 20여년 넘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사정을 듣기 위해 백씨를 찾았지만 백씨는 현재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대신 백씨의 경우와 유사하게, 지난해 동척소유로 명기된 자택을 매입한 같은 동네의 이아무개씨(71)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씨의 집은 일제시대에는 야학당이 있던 자리였다. “이전까진 세금조로만 얼마씩 받아가더니만, 지난해 쯤부터 땅을 사야한다 해서 5백만원을 주고 샀지. 우리는 땅을 사야하는지 몰랐지. 할아버지때부터 계속 산 곳인데….”

충남 논산시 연산면 백석리 주민 이병완씨는 일제시대부터 살던 집을 지난해 정부한테 5백만원에 샀다. 할머니 뒤로 보이는 건물이 과거 동양척식주식회사 명의의 토지이다.

               
 
논산시는 이 동네와 인근 동척소유 등기 대지에 대해 지난해 4월22일부터 25일까지 집중적으로 권리를 국가에 귀속하거나 실소유자 매매 작업을 벌였다. 감사원으로부터 일제소유법인 국가귀속을 종용받은 직후다. 지적을 받고서야 부랴부랴 처리했다는 눈총을 받을 만 하다.
 
“국고귀속작업을 계속해 왔고, 알면서 처리 안한 것은 없습니다.” 김용희 논산시청 회계과 재산관리계장의 말이다. 그러나 또다른 시청 관계자는 “관리가 부실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담당공무원들의 말이 이처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관련 정보에 대한 관계부처간 업무 공유도 없고, 전산화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일제소유재산을 일일이 파악하기엔 전담직원 한명 없는 상태에서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뒤늦게 ‘고충’을 털어놓는 김계장의 답변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행정기관은 서류정리하는데 시간 다 소모하지 않습니까. 민간인이 무단으로 일본인소유 재산을 점유하는 경우가 다른 곳에 또 없다고 장담 못하죠."

다른 관련공무원의 부연까지 듣다보면, 결국 찾아서 처리하진 못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관의 이같은 입장과 태도는 다른 지역에서도 되풀이된다.
 
일제명의 되돌리기 쉽지않아
 
“아, 동네사람들이야 주변에 일본인이 소유했던 땅이 어디어디인지 알지. 관에서 점검나온거? 30년동안 이장하면서 제대로 조사한 걸 본적이 없네.”
 
충남 서천군 시초면 풍정리 이장 백영기씨(63)의 말이다. 이 마을 2××-1, 2××-3번지의 토지 역시 서류상에는 동척의 소유로 돼 있다. 김석원 서천군청 재산관리계장은 “지난해 7월부터 올해 1월까지 일본인 명의 토지와 법인 토지 36필지를 공고했다”며 “현재 처리중”이라고 밝혔다.
 
“법과 현실사이에 괴리가 있습니다. 개인이 실소유주인 경우라서 국유화조치에 제외한 것이죠.” 공고를 하고 나서 그런 사실이 ‘농지분배상환완료증명서’라는 국세청 공문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에 일본법인 재산으로 계속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충남 서천군 시초면 풍정리에 있는 이 콩밭은 지금도 동양척식주식회사 명의로 되어 있 다. 실소유주가 법적으로는 무단점유자가 되는 셈이다.


           
 
풍정리의 경우 지난 50년 나아무개씨가 당시 정부의 일제소유재산 관리기관이었던 국세청으로부터 7년에 걸쳐 현물(곡물)매입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후 몇차례 주민들간의 소유권이 이전이 이뤄지며 현재는 이아무개씨가 농사를 짓고 있었다. 한국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것은 사실이나 등기를 하지 않아 지금도 동척의 소유지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명의를 실소유주에게 완전히 되돌리고 공문에 남아있는 동척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절차가 만만치 않다. 일단 현재 일제명의를 국유지로 서류상 환수조치하기 위해선 실소유자가 행정소송을 제기해서 자신이 실소유자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 풍정리 이장 백씨는 “손바닥만한 농토인데 누가 소송을 걸겠냐”며 “그냥 하던대로 계속 농사짓고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 땅은 특별한 조치가 없는 한 앞으로도 계속 동척 명의 재산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거주 주민들은 서류상 계속 무단점유자로 남아있고 관에서도 신경을 안쓰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관은 신경을 못쓰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런 땅 처리 한번 하려면 서류상자가 몇 개는 나옵니다.  하나 처리하는데만 하루는 걸리는데 전담직원도 없이 한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다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서천군의 경우 작년 하반기 이후 담당자가 지난해 10월, 올해 1월과 7월 3번이나 바뀌었다.  
 
그러나 해당공무원의 ‘애로사항’을 들으면서도 일제토지 환수․관리 노력에 의심을 품을만한 부분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정부는 현재 ‘귀속법인(본점이 일본에 있는 법인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명의 혹은 일본기관(조선총독부 등) 명의 재산에 대해서는 무주부동산 공고 없이 바로 국유화조치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해당 지자체에서는 이같은 예외규정을 적용하지 않고 일반 국유지 관리처리처럼 공고를 시행하고 있었다. 규정을 숙지하지 못했다면 일제법인 소유재산 처리의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조사하면 여전히 ‘수두룩’
 
칠갑산 줄기 망월산 자락에 있는 충남 청양군 장평면 화산리는 일제시대 중천광업주식회사(이하 중천광업)가 들어서서 중요한 군수물자였던 텅스텐을 캤던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동리 산 어귀에는 ‘이 지역은 폐광지역으로 안전사고가 우려되오니 산행이나 출입을 삼가야 합니다’란 푯말이 붙어있다. 당시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일제가 경영했던 중천광업에 인부로 일했으며, 진폐증에 걸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때는 마을을 둘러싼 산이 전부 일본회사 것이었지. 지금도 일본회사 땅이 여기저기 남아 있을거야.” 이 지역 일제법인 등기 토지의 위치를 묻자 화산리 이장인 김덕겸씨(71)는 한바퀴 돌며 주변의 산을 모두 가르켰다. 김씨가 살고 있는 자택 역시 일본인 광업회사 관리자들의 사택을 개조한 집이다. (오른쪽 사진: 김덕겸 충남 청양군 장평면 화산리 이장이 95년 화산리 지표조사를 보며 일본법인 명의 토지를 찾고 있다.)
 
김 이장이 꺼내보인 95년 조사 화산리 지표에는 당시까지 중천광업의 명의로 돼 있는 땅이 수십군데에 달했다. 현재 청양군청이 파악하고 있는 화산리 1×-1×번지, 11×-×번지, 12×번지, 14×-×번지 등 4곳이 바로 그런 곳이다. 면적으로 따지면 5천㎡가 넘는 땅이다.
 
그런데 현지확인 결과 중천광업 소유 명의의 땅이 더 발견됐다. 13×-×번지 66㎡의 토지 등은 군청에서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다. 논산시청 관계자의 말처럼 ‘일제 소유지가 더 많이 나올 가능성’이 확인된 것이다. 

청양서 일제 명의 토지 추가 확인
 
청양군청은 장평면 화산리 14-17번지, 119-1번지, 128번지, 140-2번지 네 곳이 중천광업 명의 땅으로 남아있다고 밝혔다. 본지 취재진이 현지확인한 결과 136-5번지, 137-1번지, 140-7번지가 중천광업 명의로 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본지가 새로 확인한 중천광업 명의의 토지는 모두 1천5백29㎡에 이른다.
 
흥미로운 점은 128번지, 137-1번지, 140-2번지, 140-7번지 네 곳은 모두 1941년 9월6일 한꺼번에 중천광업에서 광업재단에 속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등기부등본에는 “본호물건은 광업재단에 속할 것을 추가. 등기신청이 있어 서울지방법원 금화출장소로부터 통지”라고 쓰여 있다.
 
일제시대 광업 등을 연구하는 김인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는 “서류에 나온 광업재단은 일본 본토에 있는 특수회사일 것”이라며 “일본이 화산리 텅스텐 광산을 직접 관리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추정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광업재단은 일본본토에 있는 재단으로 광업과 관련한 전반적인 산업행위를 통제했던 특수회사이다

김 교수가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텅스텐이라 중요한 전쟁물자이기 때문이다. 중천광업이 화산리 일대에서 채굴했던 텅스텐은 비행기 기체 재료로 쓰이는 물자였다. 게다가 텅스텐은 일본제국을 통틀어 조선에서만 산출됐다. 당시 전쟁에 몰두하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전략적 군수물자였다는 것이다.
 
조선광업진흥주식회사도 광업재단과 비슷한 성격의 업무를 수행하던 곳이었다. 일제는 40년대 들어 업종별로 전체산업을 조합으로 조직해서 ‘구조조정’ 업무를 맡겼다. 조선광업진흥주식회사는 해방 이후 대한광업진흥공사로 바뀌었다.
 
김 교수는 “국유지로 귀속해야 마땅한데도 아직도 버젓이 일본법인 명의로 돼 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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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한두군데씩 일본명의 토지를 발견합니다. 화산리의 경우엔 국세청이 해방직후 한국민의 실매매 사실을 확인해서 청산대상에서 제외한 것입니다.” 양대규 청양군청 재산관리계장은 “꾸준히 작업한 결과 지금은 이같은 사례가 거의 없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아주 없다고 할 순 없다”고 덧붙였다.

청양군청 역시 다른 지자체처럼 인력부족에 의한 관리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일제소유재산 담당자는 아예 없고 국유재산을 담당 직원이 업무를 보지만 현재 출산휴가중이다. 양계장은 “보통 1~2년마다 담당자가 바뀌기 때문에 연계성이나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그나마 전담직원이 아니라 겸임이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못쓸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1년에 한번씩 실태조사를 벌이지만 대상지를 돌아다니며 불법건조물이나 용도변경은 없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일제시대 중천광업의 텅스텐 광산이 있던 곳. 중천광업이 화산리 일대에 텅스텐 광산을 세웠다다. 비행기 기체 등 군수물자를 만드는데 쓰는 텅스텐은 전쟁에 몰두하던 일제에게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지금은 폐광이 된 산 곳곳에는 접근금지를 알리는 팻말이 서있다.


 
화산리 중천광업 소유 11×-×번지 거주민인 박아무개씨도 “시부모가 매입한 땅이라 자세한 건 모르겠다”며 “상속받았으니 그냥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관의 해소 의지 ‘빈약’
 
서류상에 남아있는 일제법인 소유 토지는 대부분 무단점유자가 아닌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실소유자들의 토지였다. 일제가 직접 관리하고 있는 땅이 아닌 서류상에 존재하는 일제의 땅이었던 것이다. 6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유령처럼 일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관의 총체적 관리부실과 서류상에 한줄이라도 일제의 발자취를 남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다.
 
과거 실매매 사실이 없던 일제소유토지의 국고환수와 무단점유자에 대한 처리도 불과 몇 년전에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 “갑자기 내 땅인줄 알고 살았던 것을 다시 사라하니 자식들한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었지. 세무관계일을 하는 아들은 왜 지금와서 갑자기 그러냐고 따지더라고….” 논산에서 만난 이아무개씨의 부인인 김아무개씨(67)는 그동안 잘 살아온 집을 다시 매입해야 했던 사실에 대해 아직까지도 얼떨떨하다는 반응이었다. 국가의 귀속조치가 반세기 이상 미뤄지며 실거주민이 상당한 고충을 안은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특히 서천군 풍정리처럼 국유지로 소유권이전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50년부터 장기현물상환을 받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결과적으로 해방 60주년이 다가오는 지금까지도 일제침략도구였던 동척 명의 땅이 버젓이 남아있는 것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 안됩니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학예연구관의 지적이다. 
 
“국가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맞지요. 하지만 지자체로서도 고충이 많습니다. 사람은 없고, 업무는 산더미로 쌓여있고, 감사라도 나오면 시달리고 지적받고, 차라리 재경부에서 관련업무를 전담했으면 좋겠다는게 담당 공무원들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일제소유 재산이 버젓히 서류에 남아있는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공무원들은 하나같이 업무과중으로 맞받았다. 그러나 이같은 항변이 관의 의지부족과 관리부실을 감추기 위한 변명으로 들리는 것은 할 수 없었다.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에 동의했던 관계자는 ‘도에서도 알아주는 관련 전문가’라고 소개를 받았던 이었다. 그는 “기초자료 전산화가 완벽하게 이뤄지고 관계기관간 공조를 위해 예산확대가 필수적이며, 전문성을 유지하기 위해 전문공무원을 키워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공식직함은 임시직 청원경찰이었다.

이재환․강국진 기자 y2kljh@ngotimes.net

일제강점기 ‘수탈’ 선봉 
조선총독부와 동척, 중천광업(주)이란 
 
일제의 조선 수탈을 위해 설립된 기구가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다.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한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해 보호정치를 펴다가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그해 8월 29일 식민통치의 기관으로서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을 공포했다. 1개월 뒤인 9월 30일 "통치기관의 통합, 지방기관의 충실, 인원의 선택배치, 경비절감" 등 새 관제 시행을 위해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관제(칙령 354호)를 공포, 10월 1일부터 가동됐다. 초대 총독은 통감인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임명됐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를 수탈한 일제의 최고통치기구였다. 총독은 일본왕에 직속되어 위임받은 범위에서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 육 ·해군을 통솔해 방위를 맡으며, 모든 정무를 총괄했다. 총독에게는 총독부령 발효와 벌칙 첨가 등 매우 강력한 권한이 부여됐다. 총독부의 중앙행정 조직은 관방(官房) 및 총무·내무·탁지(度支)·농상공(農商工)·사법의 5부로 이뤄졌고, 그 아래에 9국(局)이 설치됐다. 기능별 관서로써 취조국(取調局)·경무총감부·재판소·감옥·철도국·통신국·전매국·임시토지조사국 등이 있었다. 지방행정조직은 13도로 나누고, 부(府)·군(郡)·면(面)을 뒀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1919년까지 무단통치기, 1920년부터 1936년까지 3·1운동을 계기로 분출된 민족의 독립 열기를 체제 내로 흡수하는 시기, 1937년부터 1945년까지로 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는 침략전쟁에 식민지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하던 시기를 거치며 조직이 개편됐다. 말기에는 "내선일체화(內鮮一體化)", 일본식성명강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명분 아래 민족 정신을 말살했다. 조선총독부는 8·15해방과 함께 해체됐지만 총독부 건물은 논란 끝에 김영삼 정권 시절인 1995년 8월 해방 50주년 때 철거됐다.
 
동척은 1908년 의회에서 동양척식회사법을 통과시킨 다음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1천만원(20만주)의 자금으로 세운 착취기관이다.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같이, 일제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일제는 당시 패망한 조선 왕실로부터 토지 1만7천7백14정보를 출자 받았고, 1913년까지 토지 4만7천1백48정보를 헐값으로 사 들였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뒤 1920년 말에 동척의 소유지는 한국 경작지의 1/3에 달하는 9만7천여 정보였다. 또한 일제는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해 산림지를 가로챘고, 1942년 말 동척이 소유한 임야는 16만여 정보에 이르렀다.
 
동척은 강제로 수탈한 토지를 소작인에게 임대해 50%가 넘는 살인적인 소작료를 징수했다.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추수 때 20%가 넘는 고리의 현물을 돌려 받았다.
 
반면 일제는 1910∼1926년 동안 17회에 걸쳐 일본인 이민 희망자 약 1만 명을 엄선, 각종 특혜를 주면서 경기·경상·전라·황해·충청도 등 조선 전역에서 조선 수탈의 앞잡이로 써 먹었다. 일제의 수탈로 1926년까지 조선인 빈농 30만 명이 토지를 잃고 북간도로 이주했다.
 
동척은 1917년 회사법을 개정해 본점을 도쿄(東京)으로 옮기고 만주와 중국 등 아시아 침략을 위해 봉천, 대련, 하얼빈, 간도, 신경 등에 지점을 설치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조선 땅을 병참기지화하기 위해 중공업 분야에 투자를 집중했고, 이에 따라 동척도 전기·탄광·제철 등 각 분야에 투자했다. 그러면서도 동척은 조선 농민에 대한 수탈을 강화했고, 1920-1930년대에 농민들의 소작쟁의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참다 못한 의열단원 나석주가 1926년 12월 28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에 그쳤다(나석주는 일경과 대치하다가 자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동척은 해방 직후 미군정 치하에서 신한공사로 바뀌었다가 1948년에 해체했다.
 
중천광업주식회사(中川鑛業株式會社)는 “광물 시굴과 채굴, 정련가공과 매매, 광산물을 원료로 제조하는 공업과 생산품 판매”를 하던 회사였다. 일본인 中川湊가 자본금 2백만원으로 1937년 3월16일 설립했다. 당시 2백만원은 지금 돈으로 2천억원 가까이 되는 거금이다. 본사는 남대문 부근에 있었으며 청양군 장평면 화산리 인근 산을 매입해 텅스텐을 채굴했다.
 
 <자료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등>


2004년 8월 6일 오전 6시 24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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