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는 가끔 로또를 한다. 1등 당첨될 경우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들에 대해 ‘사회적 대타협’을 맺기도 했다. 첫째, 1등 당첨과 동시에 이혼은 절대 없다. 둘째, 1등 당첨시 진짜 진짜 멋진 서재를 만들어준다. 셋째, 당첨금은 모두 가장이 관리한다(참고로, 나는 가장이 아니다).
내 집 마련은 딴나라 얘기고 전세값은 살떨리게 오르는데다 국공립보육시설은 기약없고 민간보육시설은 비싸기만 하다. 학비는 또 왜 그렇게 비싼지. 이럴 때 로또 한 장은 나름 기분전환으로 나쁘지 않다. 서민들에게 로또로 대표되는 복권이란 ‘그림의 떡’일망장 손앞에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더 나아가 복권을 운영하는 주체인 정부는 예나 지금이나 복권수익금을 ‘서민 복지 지원’에 사용한다고 거듭 거듭 광고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 대목에서 이상한 생각이 든다. 정부 기금으로 쓰인다는 건 복권수익금이 사실상 조세수입이나 다름없다는 얘기 아닐까? 그럼 로또 번호에 검은색 칠하는 분들은 열심히 세금내고 있는걸까? 또 한가지, 주위를 눈씻고 둘러보시라. 이건희 회장이 로또 했다는 얘기 들어본적 있나? 최철원 회장은 로또 당첨된 거 믿고 “한 대에 100만원씩”이라며 야구방망이를 휘둘렀을까? 복권하는 사람은 대부분 서민들이다. 그럼 ‘서민’들이 5000원씩 낸 세금으로 ‘서민’ 지원하는데 사용한다는 건데,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데이비드 니버트가 쓴 『복권의 역사』(신기섭 옮김, 2003, 필맥)은 복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이런거다. 복권은 서민지원예산을 보완하는가 대체하는가. 복권은 세금인가 아닌가. 세금이라면 더 많이 버는 사람이 더 내는 세금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복권의 역사』는 미국 사례를 분석한 책이지만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니버트(90~91쪽)에 따르면 복권은 서양에서 17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자본을 창출할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사기와 부패, 빈곤층 착취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고 이 때문에 국민경제를 위기에 몰아넣은 적도 있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공식적인 금융기관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복권은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미국의 경우 복권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주 정부가 산업침체와 일자리 감소에다 세금 인상에 대한 반발까지 직면한 상황에서 금고를 채워야 할 절박함 때문이었다(86쪽). 미국 주 정부와 지방 정부들은 1980년대 내내 이중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경제침체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레이건 대통령이 이끄는 연방정부는 예산지원을 줄여 나갔다(87-88쪽).
이런 이유로 니버트는 “오늘날 복권은 기업 구조조정과 사유재산 집중화가 심해지는 와중에 빈털터리가 된 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됐다(98쪽).”라고 규정한다. “세수 문제가 요즘 주 정부 복권사업의 존재 이유다. 복권을 도입한 모든 주 정부가 세수 증대 가능성을 주로 강조했다(88쪽).”
복권은 결국 보이지 않는 세금이다. 그것도 아주 아주 역진적인 세금이다. 복권은 우리같은 서민들이 한다. 그렇게 몇천원씩 모인 돈이 1년에 무려 2000억원 가까이 된다. 그럼 이 돈을 저소득층 지원에 제대로 쓰기는 하는걸까?
조선일보가 2010년 2월 16일자에 쓴 기사에 따르면 전체 복권기금 법정배분금 1873억원 중 62%가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분류된 (16개) 지방자치단체와 과학기술진흥기금, 중소기업진흥기금, 제주도개발특별회계 등 모두 4개 부문에 작년(2009년) 한 해 동안 1168억원이 지원됐다.”고 한다. 이쯤 되면 복권이란 신기루를 쫓기 위해 서민들이 낸 돈으로 서민들과 별 상관없는 곳에 쓰는 세금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다시 ‘대체와 보완’을 생각해보자. 정규직을 ‘보완’했던 비정규직이 언제부터인가 정규직을 ‘대체’해 버리는 것처럼 복권기금은 저소득층 지원예산에 플러스 알파로 더하는게 아니라 저소득층 지원예산을 대체하는 구조다.
저자에 따르면 복권을 도입하는 주들은 교육예산 확보를 명분으로 내걸지만 실제로는 복권을 통해 확보한 추가 교육예산만큼 주 의회가 교육에 배정하는 일반예산을 줄여 버린다(121쪽). “미시간, 뉴욕, 일리노이 등 3개 주에 대한 연구는 공통적으로 복권수입이 주 정부 교육예산을 확충하는 게 아니라 대체하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했다(122쪽).”
그래서 저자는 단언한다. “1977년 세금 역진성에 대한 연구를 벌인 결과 정부 복권사업이 판매세(한국의 부가가치세에 해당)보다 두세배는 더 역진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 정부가 운영하는 복권은 역진적이며 그 역진성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연구보고가 늘고 있다(106쪽).”
이런 가운데 한국 정부는 새로운 복권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동아일보 12월1일자 기사에 따르면 1등에게 월 500만원씩 20년간 지급하는 ‘연금식 복권’, 당첨금을 1000만원 상당의 경차로 주는 ‘경품복권’ 등인데 그 이유가 눈길을 끈다.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해보자. “정부가 연금복권, 경품복권 같은 다양한 복권을 내년에 선보이는 이유는 로또복권(온라인복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복권사업의 수익구조를 다변화해 다양한 연령층의 건전한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2010년 상반기 총 복권 판매액은 1조 2598억원이다.
복권에는 세가지 함정이 숨어있다. 세금이 아닌 듯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금이다. 세금은 세금인데 서민들이 주요 납세자인 역진세이다. 무엇보다도, 서민을 위해 사용한다면서 서민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보다 딴데 쓰는 예산이 더 많다.
<이 글은 월간 좋은예산 1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아울러 월간 좋은예산에 기고한 여섯 번째 예산서평입니다.>
2010/07/06 - [자작나무책꽂이] - <프리런치>, 예산문제로 글을 쓰려거든 이 책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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