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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낭비라는 이름의 데자뷰

예산생각

by betulo 2010. 10. 20.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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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을 지날 때 언젠가 와 본 곳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처음 보는 대상을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데자뷰라고 부른다. 어린 시절 할머니들은 전생의 기억 가운데 일부가 남아서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라고들 했다. 그런데 데자뷰는 길을 걸을 때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신문에서 예산과 관련한 기사를 찾아보자.


언젠가 눈여겨 봤던 예산낭비 사례가 시시때때로 되풀이된다. 언젠가 분노를 느꼈던 호화청사 건립 문제, 언젠가 혀를 끌끌 찾던 민자도로, 언젠가 황당해 했던 손님 없는 지방공항, 언젠가 외국에도 이렇게 아무런 감시도 받지 않는 쌈짓돈이 있을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던 특별교부금과 특별교부세와 특수활동비...

 


예산낭비만 그런게 아니다. 1년을 단위로 예산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눈을 혼란스럽게 하는 데자뷰 연속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2009년도 결산분석보고서에서 제출한 예산낭비 유형을 보자. 필요성·공익성 결여, 유사·중복사업, 집행실적 부진, 과다·과소 편성, 사업성과 미흡, 법령 위반, 사업계획 부실, 유사중복사업, 법·제도 미비, 목적외 사용, 집행관리 부적절, 국회 지적사항 미반영 등이다. 그리고 나서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지적받는 문제점은 무엇일까.


 십중팔구 법적근거가 미비한 사업에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부진 사업에 버젓이 또 예산을 편성하고, 사업계획도 제대로 안된 사업에 예산 달라고 하고, 터무니없이 과다·과소 편성해놓는다.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예산반영 안해줄까봐 국회 감시 안받는 곳에다 숨겨놓기도 한다.


정권 핵심부 ‘관심 사업’으로 제목을 뽑은 비슷비슷한 중복사업들이 정부부처마다 넘쳐나는 것도 오랜 전통이다. 요즘은 심지어 예산안 규모를 적게 보이게 하기 위해 공기업에 떠넘겨 놓고 눈가리고 아웅하는 ‘선진화’된 재정기법도 등장했다. 그리고 나서 시간에 쫓겨 예산안은 통과될 테고 내년 봄에 우리는 다시 어디선가 많이 보던 ‘결산해보니 이런 문제가 나타났다.’는 기사를 보게 될 것이다.


 왜 우리는 해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하는 문제를 되풀이해야 하는걸까. 구내식당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여지껏 맛없는 반찬 나와도 미안하다는 사람 하나 없고 ‘리필’도 안되는, 성분표시도 제대로 안되는 곳을 이용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우리가 낸 돈으로 맛있는 한끼를 즐길 방법을 고민할 때도 된 것 아닌가?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건 문제제기를 강하고 정확하게 하는 것이다. 서비스 수준을 높이고 성분표시도 제대로 하게 하는데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다. 갈수록 예산낭비를 고발하는 기획기사가 늘어나는 것은 반갑고 기쁜 일이다. 하지만 ‘혈세가 줄줄 샌다’는 문제제기가 ‘공무원은 혹은 국회의원은 생선가게 고양이’라는 결론으로만 치닫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생긴다.


 분명 공무원이나 국회의원이 생선가게 고양이 구실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일부 언론의 경우 그런 지적 뒤에는 항상 ‘철밥통’ 담론이 등장하고 ‘그러니까 민영화해야 한다’거나 ‘경쟁을 하지 않으니까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결론을 유도하는 걸 본다. 방만한 운영 때문에 건강보험이 줄줄 샌다, 그러니까 영리병원 허용해서 경쟁시키자는 식이다.


또 하나,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방식은 자칫 불과 몇년전 전국민의 스포츠였던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나 요즘 떠오르는 신종 스포츠인 ‘이게 다 가카 때문이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잠시 기분은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우리가 뽑았다는 것과, ‘우리는 딱 우리 수준에 맞는 민주주의를 갖는다’는 교훈을 되돌아볼 필요도 있어 보인다.


 예산에 관심을 갖고 5년 가량 예산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면서 느끼는 점은, 예산낭비는 경쟁보다는 오히려 공공성이 부족해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2008년 교육과학기술부장관 사퇴까지 불렀던 특별교부금으로 모교 혹은 자녀학교에 격려금 주던 행태를 기억해보자. 특별교부금과 경쟁하는 특수교부금이 없어서가 아니라 특별교부금이 교과부를 제외한 어느 누구의 공적 통제도 받지 않는 교과부 전용 ‘쌈짓돈’이라는게 사태의 근원이다.


4대강 사업과 지방자치단체 호화청사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도 맥락은 비슷하다. 둘 다 계획수립과 예산편성·집행 과정에서 신속한 의사결정과 임기내 사업완료를 위한 효율성은 극대화시키는 반면에 공공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재정이란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수단이며 그렇게 돼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4대강은 토론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자세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국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특별교부세, 특별교부금, 문화체육관광부 공익사업적립금이 존속해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그 빈자리는 지역에서는 참여예산제도가, 중앙정부에선 모든 예산지출을 법률 형태로 국회가 공포하는 예산법률주의로 채우게 될 것이다. 호화청사 짓다 위기를 맞는 지방정부나 강바닥에 공구리치기 독려하는 중앙정부에게 부족한 건 경쟁과 효율도 아니고 군인정신은 더더욱 아니다. 문제는 투명성·주민참여·공공복리 그리고 ‘공적 통제’다.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1.11.17. 추가
투명성, 주민참여, 공공복리는 바로 공공성의 3대 요소다. 결국 핵심은 공공성 강화에 있다.

재정민주주의, 재정법률주의, 공공성 강화는 어느 방향을 지향하는 것일까. 나는 '인권인지적 예산'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 개념을 정리하는 단계이긴 하지만 '성인지 예산'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에서 '인권인지적' 관점을 재정정책에 도입하는 게 개인적인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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