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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호민관클럽

by 비회원 2008. 8. 1.



고대로마는 초기에 왕정이었다.
왕은 군사 ·정치 ·제사의 여러 권능을 집중시켜 절대적이며 무제한적인 강력한 임페리움[명령권]을 가졌으나, 사실은 원로원 ·민회가 이것을 제약하여 동방에서와 같은 왕권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이때 시민은 시민에게는 파트리키(귀족)와 플레브스(평민)으로 구별했다. 파트리키는 많은 클리엔테스(피보호인)을 소유하고 있었다. 파트리키와 플레브스를 구별한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역사가 분명해진 시대에는 파트리키란 특정한 가계에 속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고, 그 이외의 사람은 아무리 재산이 많고 지식이 있어도, 파트리키가 될 수 없었다. BC 6세기 말 에트루리아인 왕의 압박이 심해졌을 때, 왕을 국외로 축출하고 공화제를 수립한 주체도 바로 이들 파트리키였다. 이들은 원로원을 중심으로 공화정을 주도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로마 원로원을 묘사한 그림.


로마 공화제 초기에 국가의
지배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파트리키였으며, 플레브스는 정권에서 제외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플레브스의 대부분 파트리키의 억압하에 있었다. 따라서 플레브스는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하여 파트리키에 대하여 격렬한 신분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투쟁과정에서 생겨나 그 주역으로 활약한 것이 호민관(護民官)이었다. 호민관은 BC 494년의 ‘성산사건(聖山事件)’ 때에 설치되었다. 성산사건은 플레브스들이 로마의 성산을 점거하고 협상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플레브스 자신들도 성산사건을 계기로 하여 평민단(平民團)으로서의 기구를 형성하고 그들에게서 선출된 호민관을 중심으로 ‘국가 속의 국가’로 불릴 만큼 독자성을 가지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원로원과 호민관은 적대관계였다. 호민관 제도는 민중이 원로원을 견제하고 민중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호민관에겐 원로원 결의에 대한 거부권이 있었다.

그러나 BC 287년 호르텐시우스법제정 이후 호민관의 권한이 증대되었다. 공화정 말기에는 평민회 의장으로서 또는 거부권 발동에 따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정쟁(政爭)의 도구가 되었다. 이 직위를 발판으로 삼아 사회개혁을 기도한 것이 그라쿠스 형제이다.

당시 극심해진 빈부격차를 해소하려던 그라쿠스 형제는 귀족세력에 의해 지지자 수천명과 함께 살해 당한다. 그들은 민주정을 주장하면서 그라쿠스형제가 계급독재를 한다면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후 그들은 술라를 앞세워 공포정치를 시행한다.


술라는 호민관제도를 사실상 정치시키고 독재를 실시하는데, 민중파 독재자 카이사르가 등장하여 이들을 제압하였으나 역시 암살당한다. 이후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민주정이 파괴된 상태에서 황제가 지배하는 제정을 실시하는데, 원로원은 역할을 사실상 부정당하고 황제의 결정에 자문하는 역할에 머문다. 


원로원들의 이기심은 결국 자신들의 존재까지 부정하게 만들어 버린다. 지금 국회는 현재의 위기상황에 대해 무력함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그저 원로원이었을 뿐인가. 모 의원의 말처럼 원로원이 되지 않고 호민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17대 국회의 호민관 클럽이 사실상 원로원역할을 했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카이사르도 절대 아닐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도 카이사르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창수(역사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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