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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

17대 국회, 자동폐기되는 민생법안 188개

by betulo 2008.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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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시민행동이 드디어 사고를 쳤다. 정책실 소속 간사 대여섯을 동원해 국회 전문위원 검토보고서, 법안제안서와 설명서, 회의록 등 자료를 뒤지고 또 뒤졌다. 3000개가 넘는 국회 계류법안에서 민생법안이라 할 만한 법안 188개를 찾아냈다. 무려 두 달이나 걸렸다.

기자란 직업은 연결망분석에서 말하는 브로커(혹은 매개자) 구실만 잘해도 큰 역할을 하는 때가 있다. 보도자료를 어떻게 쓸 줄 몰라, 써놓고도 누구한테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지금도 좋은 발표자료 품에 안고 자장가 불러주는 시민단체가 적지 않은 현실에선 더욱 그렇다.  

나도 물론 독자적인 취재를 통해 시민단체와 함께 뭔가를 만들어간다. 내가 생각하기에 시민단체에서 조사한 자료를 공동기획이라는 이름으로 보도하는 것을 예전에 어느 시상식장에서 배우 황정민이 했던 표현을 패러디해 표현한다면 시민단체가 만들어놓은 밥과 반찬에 김 한 장 올려놓고는 맛있게 먹는 것 쯤 될거다. 단지 숟가락만 올려놓는 정도는 아니다, 적어도 김 한 장 올리는 수고는 한다, 뭐 그정도 되겠다.

어디에나 상도의가 있다. 남이 차려준 밥 잘 먹었으면 단돈 100원이라도 밥값을 내야 한다. 나는 "이 기사는 이 단체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나왔습니다."라는 걸 널리 널리 대놓고 알리는 일이 첫번째라 본다. 기사 앞머리, 보통 문패라고 하는 곳에 최소한 공동기획이라는 이름으로 단체 이름이 큼지막하게 나가야 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상도의다.

어떤 기자들이 나에게 반론을 제기했다. 그렇게 하면 "신문이 시민단체 받아쓰기만 하는 걸로 비치게 되니까 격이 낮아진다." 혹은 "시민단체에서 받은 자료에 더해 독자적으로 취재를 하고 새로운 내용도 넣으면 되는거지 굳이 밝힐 필요가 있느냐."

첫번째에 대해 나는 "그런 자세 때문에 시민단체 사람들이 언론을 오만방자하고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한다."고 전해주고 싶다. 시민단체 사람들은 그런 얘기 들으면 대번 이렇게 말할 거다. "정부 보도자료 받고 기업 홍보성 기사 쓰는것도 그렇게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느냐."

두번째는 모호한 경계가 있는건 사실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자료를 쓰는 것과 단독으로 받아서 보도하는 것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거다.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하는 건 기사를 쓰면서 기사 내용 속에 출처만 분명히 밝히면 된다. 하지만 단독으로 보도하는 경우에는 그만한 밥값을 해야 한다. 당연한 거 아닌가?

(일부에서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첨언한다. 기본적으로 공동기획이란 건 서로 밥값을 해야 하는거라 본다. 나 스스로 시민단체와 공동으로 기획기사를 쓸 때 단지 보도자료만 먼저 받아쓰는 식으로 해본 적은 없었다고 자부한다. 때로는 기획초기단계부터 때로는 기획결과물을 바탕으로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취재는 필수다. 거기서 기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다만,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강한 '아이디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해주기 바란다.)

각설하고, 함께하는 시민행동 덕분에 좋은 기사를 쓰게 됐다. 조사작업을 주도한 정책실장 정란아를 비롯하야 함께 고생한 정책실 분들께 경의를 표한다. 아래는 관련 기사를 붙여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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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9일로 17대 국회가 막을 내리면서 자동폐기되는 법안 중 서민생활에 필요하거나 소수자 보호 등 사회적 가치가 있어 시급히 처리해야 하는 이른바 ‘민생 법안’이 188건이나 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전문가들은 18대 국회에서 우선적으로 관련 법안들을 처리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22일 서울신문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17대 국회 법안 처리 현황을 조사한 결과, 접수된 전체 법안은 7488건이었다. 이 가운데 이날 현재 처리된 4335건(58.2%)을 제외한 나머지 계류 법안은 의원발의 2943건, 정부제출 210건 등 모두 3172건(42.3%)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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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류법안 가운데 대학 등록금 상한제와 학원 수강료 초과징수 관리감독 강화 등 사교육비 절감 관련 법안, 개인정보 유출 방지와 금융소비자보호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관련 법안, 국민기초생활보장 법안과 학교 급식 원산지 표시 등 서민 삶에 영향을 미치거나 양극화 해소에 기여할 법안 등 188건이 민생법안으로 분류됐다.

상임위별로는 재정경제위원회 법안이 35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보건복지위 22건, 농해수산위 20건, 정무위 18건, 산자위 17건, 환경노동위 16건, 교육위 12건 등의 순이다.

입법 단계별로는 발의만 되고 상임위에 상정되지 않은 법안이 64건, 해당 상임위에만 상정되고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되지 못한 법안이 123건, 법사위에 상정된 법안이 1건이다.

발의 주체별로는 정부제출이 3건이고 나머지는 모두 의원 발의였다.

동국대 정치학과 교수 박명호는 “민생 법안 자동 폐기는 회기 절차상 해마다 반복되는 고질적인 문제로 중요 법안의 경우, 다음 국회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면서도 “국회의원들이 시민단체 등의 외부평가에 민감해지면서 예산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과시용 법안이나 유사법안 등을 쏟아내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함께하는 시민행동 정책실장 정란아는 “폐기되는 법안 상당수가 발의 이후 논의조차 되지 않거나 상임위에 상정돼 전문위원 검토보고와 소위 논의를 거친 후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한 상태”라면서 “법 재·개정에는 많은 사회적 비용이 소요되는 만큼 법안 상정을 하지 않은 이유라도 명확하게 밝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18대 국회가 민생법안이 아니라 규제완화나 경제 자유화만 신경쓰지나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조현석 강국진 김민희기자 betulo@seoul.co.kr

2008년 5월23일자 1면 게재


"자동폐기된 민생법안, 18대 국회서 우선 처리해야"
진보신당 대표 노회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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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상임대표 노회찬은 “큰 기대를 모으며 출발했던 17대 국회조차 민생법안 처리에서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면서 “진정 서민을 생각하는 국회가 되기 위해선 정당의 정책역량을 강화하고 시민사회와 적극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일부터 청와대 앞에서 노숙농성중인 노회찬을 22일 아침 만나 17대 국회 평가와 18대 국회에 바라는 점을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17대 국회를 평가해 달라.

  -17대 국회는 의원발의법안이 월등히 많은 것에서 드러나듯 입법·정책 활동이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다만 마무리를 제대로 못했다. 용두사미가 돼 버렸다. 법안 발의만 신경쓰고 통과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 결과적으로 무책임에 가까울 정도로 고통받는 서민들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나 싶다.나도 큰 책임감을 느낀다.

  →원인이 무엇이라 보나.

  -국회의원 개개인의 의지와 의욕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결국 시스템 문제다. 입법활동조차 의원 개개인의 역량에 의지할 뿐 정당에서 제대로 뒷받침을 못한다. 정당 차원의 정략적 목적 아래 발의된 법안 말고는 책임지는 곳이 없다. 개개인의 의지에 의지하다 보니 부실한 법안도 많았다. 주택임대차보호법안이나 상가임대차보호법안은 여야 3당에서 모두 발의했지만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 여론이 들끓으면 너나없이 법안 발의했다가 슬그머니 묻어버린 민생법안이 한두개가 아니다.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에서는 내가 속해 있었던 민주노동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민생법안 처리를 위해서는 사회적 대화를 위한 시스템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게 바로 의정활동을 하면서 얻은 중요한 교훈이다. 민주노동당은 상대적으로 시민사회와 연대해 법안을 관철하기 위한 캠페인을 많이 한 편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의석수가 부족하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우격다짐이 아니라 사회적 공론화를 위한 합리적 논리와 명분을 개발해 사회적 힘을 모으고 민생법안 통과를 압박해야 한다.

→18대 국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새로운 이슈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전 국회에서 단골로 등장했지만 사신됐던 민생법안들을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한다. 여야가 발의한 법안 통과율이 높은 이유가 뭘까.정부는 법안 통과를 위해 의원들보다 훨씬 더 집요하게 노력한다. 의원발의법안 일부는 법안으로서 품질이 낮은 경우도 있다.국회가 반성해야 한다. 국회는 입법을 통해 정부를 견제하는 곳이지 정부활동을 위탁해서 처리하는 곳이 아니다.

  2008년 5월23일자 6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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