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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몽골 이야기

몽골시대 - 유라시아를 넘나든 사람들

by 자작나무숲 2007.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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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치는 시기의 세계사는 말 그대로 "몽골시대"였다. 몽골고원에서 시작해 동심원으로 확장된 몽골제국은 유라시아의 거의 대부분을 통치했다. 그리고 이 동안에 세계는 몽골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이 시기 유럽에서 정치, 경제, 종교상의 이유로 많은 이들이 몽골을 방문했다. 그들 중 일부는 여행기도 썼는데, <동방견문록>이 대표적이다. 이 글에서는 이 시대 동방과 서방을 여행한 사람들 중 몇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칭기스칸의 손자인 바토(Batu)를 우두머리로 하는 몽골군이 처음 동유럽에 나타났을 때 유럽인들은 이들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무슨 언어를 쓰고 어떤 종교를 믿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당시 유럽 최강이라고 하던 헝가리 군을 전멸시키자 유럽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유럽인들은 몽골인들을 지옥의 사자라는 뜻으로 '타르타르(Tartar)'라 불렀다. 그런 몽골군이 어느 날 갑자기 유럽에서 물러났다. 유럽은 이유도 모른 채 구원받았다. 이 충격은 꽤 오랫동안 유럽을 짓눌렀다.


교황 이노센트 4세는 1245년에 머나먼 동방으로 사신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몽골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 정보수집도 겸한 사절이었다. 서아시아방면으로는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동유럽과 러시아 방면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사절을 파견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페르시아 지역까지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 당시 60세를 넘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카르피니(John of Plano Carpini)는 1245년 4월 6일 프랑스의 리옹을 출발해 조치 올로스(일명 킵착칸국)의 칸이었던 바토(Batu)를 만났고, 1246년에 구유크카간의 즉위식을 목격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는 고려에서 온 사신들도 보았다. 그가 리옹에 돌아온 것은 1247년 가을이었다. 카르피니는 몽골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몽골인의 역사(Historiae Mongalorum)>라는 보고서를 남겼다.


1253년에는 루브룩(William of Rubruck)이라는 수도사가 몽골제국의 서울인 카라코롬을 방문했다.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교황 이노센트 4세의 친서를 갖고 러시아 지역을 거쳐 1254년에 몽골제국의 서울인 카라코롬에 도착해 멍케카간과 회견을 했다. 네스토리우스교 수도사들과 신학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루브룩은 루이 9세에게 전하는 멍케카간의 친서를 갖고 1255년에 유럽에 도착했다. 그는 <여행기(Itinerarium)>라는 보고서를 썼는데,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당시 루브룩은 멍케카간의 오르도(Ordo)에서 많은 유럽사람들을 만났다. 헝가리 여자, 그녀와 결혼한 러시아 건축가, 파리 출신 금세공인, 헝가리 태생의 영국인 아들 …


루브룩은 상당히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했다. "거리낌없고 독선적이었으며 사태를 지나치게 자신의 입장에서 평가·표현하는 성향이 있었던" 카리피니와는 달랐다. 루브룩의 {여행기}는 날카로운 관찰이 돋보이는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어서 사료적 가치도 높다.


카르피니가 몽골인들의 '야만성'과 잔인 무도함을 강조해 위기를 부채질했다면, 루브룩은 훨씬 객관적이었다. 그런데도, 카리피니는 유럽에 돌아와 일약 '스타'가 된 반면에 루브룩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어쩌면 카르피니가 얘기하는 몽골의 '이미지'가 당시 유럽인들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은 아닐까.


몽골을 방문한 유럽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가 마르코 폴로(Marco Polo)일 것이다. 그가 썼다는 <일 밀리오네(Il Milione)>, 즉 <백만의 서(書)>(<동방견문록>은 그 속칭)는 수백년 동안 유럽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동방의 대제국으로 일생을 건 항해에 나서면서 콜롬부스가 갖고 있던 책도 <동방견문록>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그가 과연 실존인물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폴로라는 성을 가진 집안이 여럿 있었고 마르코란 이름도 아주 흔한 이름이었다. 그렇다고 <동방견문록>이 엉터리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동방견문록>에는 당시 몽골제국과 코빌라이카간을 둘러싼 일급기밀이 거리낌없이 등장한다. 코빌라이카간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내용이다. <동방견문록>에는 만리장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 이것은 당시의 실제견문을 담았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그는 바다길을 통해 오늘날 이란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그 일행이던 정사(正使) 한 명과 부사(副使) 두 명의 이름은 14세기 페르시아어로 쓰인 <왓사프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마르코 폴로는 당시의 역사기록에 그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어쨌든 <동방견문록>의 근본이 되는 견문이나 경험을 가진 인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일 수도 있다. 마르코 폴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코빌라이카간이 죽기 1년 전인 1293년에 교황 니콜라스 4세는 카톨릭 전도를 위해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이탈리아인인 지오반니 다 몬테코르비노를 칸발릭[大都, 지금의 북경]으로 파견했다. 그는 칸발릭에 도착해 코빌라이카간의 계승자인 테무르카간[元 成宗]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그는 칸발릭에 머무는 기간동안, 1만명 이상의 몽골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코빌라이카간의 사위였던 게오르게스[闊里吉思]도 있었다. 게오르게스는 원래 네스토리우스교도였다.


몬테코르비노는 칸발릭에 교회 두 곳을 세웠다. 그 중 하나는 1291년에 칸발릭에 정착한 이탈리아 상인 페트루스 다 루칼롱고가 기부해준 땅이었다. 1307년 교황 클레멘트 5세는 몬테코르비노를 칸발릭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이후 교황들은 여러 차례 수도사를 파견하여 카톨릭 포교에 힘을 기울였고 몽골제국에서도 이들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이들 전도사들이 교황청에 보낸 편지들 가운데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세계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행가인 14세기 모로코 출신의 무슬림 이븐 바투타(Ibn Battuta, 1304-1368)는 성지순례를 위해 처음 고향을 떠난 이후 아라비아반도는 물론, 오늘날의 이란, 러시아, 터키, 중앙아시아,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지중해, 사하라사막 이남, 스페인 등 무려 10만Km가 넘는 거리를 30년(1325-1354)에 걸쳐 여행했다.


그의 발자취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곳곳에 걸쳐 있다. 특히 그는 대원 올로스, 조치 올로스, 차카타이 올로스, 훌레구 올로스 등 몽골제국의 주요 정권을 두루 여행했고, 훌레구 올로스와 조치 올로스의 칸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그가 여행한 길은 당시 몽골제국의 유라시아 교통로였고, 역사적으로 실크로드의 주요한 일부분이었다.


몽골시대에는 서방에서 동방을 여행한 사람만 있었던 건 아니다. 동방에서도 많은 이들이 서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 가운데 몽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났던 두 사람의 몽골인이 있다. 한 명은 네스토리우스교[景敎]의 총대주교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유럽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로마와 프랑스까지 방문하기도 했다. 시리아어로 쓰여진 그들의 전기가 전해진다.


예수의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던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이들은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탄핵받자, 지금의 이란을 본거지로 해서 동방전도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네스토리우스교가 등장했다. 한문기록에는 경교(景敎)로 적혀있다. 중국에 한때 많은 네스토리우스교 지역 공동체가 번성하기도 했다.


칭기스칸이 몽골제국을 건국할 당시에도 유목민 가운데 많은 네스토리우스교 신자가 있었다. 톨로이(칭기스칸의 막내아들)의 아내로 멍케카간과 코빌라이카간의 어머니였던 소르카크타니, 훌레구의 카톤(몽골어로 황후)인 터구스 등도 독실한 신도였다.


네스토리우스교는 몽골제국 초기부터 칸발릭에 대주교를 갖고 있었고, 몽골 지배귀족 가운데 많은 교인들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몽골인 중에는 시몬, 게오르게스, 바오로, 요한, 야곱, 누가, 예수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지금의 내몽골에서 태어난 랍반 사우마(?-1294)와 마르코스(1245-1317)는 네스토리우스교 수도사였다. 독실한 신자였고, 고행과 명상에 열심이던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굳은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그들은 바그다드에 도착해 네스토리우스교의 총대주교인 마르 덴하를 만났다.


1281년 마르 덴하가 죽고, 바그다드 부근에서 열린 네스토리우스교 평의회에서 마르코스는 마르 야흐발라하 3세라는 이름으로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마르코스는 그 후 죽을 때까지 네스토리우스교의 우두머리로 활동했다.


훌레구 올로스(속칭 일칸국)의 칸이었던 아르곤은 1287년 당시 네스토리우스교의 고위 성직자였던 랍반 사우마가 이끄는 사절을 유럽에 파견했다. 당시 조치 올로스와 이집트에 있던 맘룩왕조가 동맹을 맺어 훌레구 올로스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훌레구 올로스는 유럽과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랍반 사우마는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해 비잔틴제국의 황제를 만난 후 배를 타고 나폴리에 도착했다. 로마에 도착하기 직전에 교황이 죽었기 때문에 추기경들의 영접을 받았다. 당시 랍반 사우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의 많은 교부들-즉 7세기와 8세기의 네스토리우스교 선교사들-이 투르크, 몽골, 중국인들의 땅으로 가서 그들을 가르쳤음을 아십시오. 오늘날 많은 몽골인들이 그리스도교도이고 그 중에는 왕과 왕비의 자녀들이 있으며, 그들은 세례를 받고 크리스트교 신앙교백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거영지에 교회를 갖고 있습니다. 아르곤칸은 나의 주인이신 총대주교와 우정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는 시리아를 갖기를 원하며, 예루살렘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여러분의 도움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랍반 사우마는 1287년 프랑스의 파리에 도착해 국왕의 영접을 받았다. 로마로 돌아온 랍반 사우마는 새로 선출된 교황 니콜라스 4세를 만났다. 그는 교황, 프랑스왕, 영국왕이 아르곤칸에게 보내는 편지를 갖고 1288년 무렵에 훌레구 올로스로 되돌아왔다.


수많은 사절단, 상인, 여행자, 순례자들이 몽골시대에 유라시아를 넘나들었다. 위에서 다룬 사람들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이들의 발자국 하나 하나가 모두 동서교류사의 흔적들이다. 오랜 옛날부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사람들이 움직였다. 문화와 종교와 신기술들이 전파되었다.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는 결코 단절된 별개의 역사세계가 아니었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몽골시대를 거치면서 유럽까지 전해진 것도 이 시대 동서교류사가 남긴 한 업적일 것이다.


<참고문헌>

르네 그루쎄, 김호동 외 옮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서울: 사계절, 1998.

박원길, <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1998.

스기야마 마사아키, 임대희 외 옮김, <몽골세계제국>, 서울: 신서원, 1999.

이븐 바투타, 정수일 옮김, <이븐 바투타 여행기>,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1.

Dawson, Christpher. ed & tr. The Mongol Mission, London and New York: Sheed and Ward,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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