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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생각한다/경찰 개혁론

남영동 보안분실 509호 가는 길

by 자작나무숲 2007. 3. 25.


지난 4일 아침 지하철이 1호선 남영역에 닿자 문이 열린다. 문을 나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검은색 벽돌로 둘러싸인 높다란 건물이 대번 눈에 들어온다. 중간에 쇠창살로 둘러싼 창문하나가 있고 그 위로도 창문이 몇 개 보인다. 


개찰구를 지나 출입문으로 나선 다음 오른쪽 길로 들어서 몇십미터 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간다. 골목 오른편에는 높은 담벼락 위로 철조망이 얹어져 있다. 조금 더 가면 철문으로 된 커다란 문이 나온다. 예전에는 항상 굳게 닫혀 있었던 문이 이제는 활짝 열려 있다. 바로 공식적으로는 경찰청 보안국 보안3과 청사였던 남영동 보안분실이 있던 곳이다. 


남영동 보안분실 내부. 방과 방, 방과 복도는 모두 문으로 격리돼 있다.


정문을 지키는 전경들에게 신분증을 제출하고 건물로 들어선다. 이미 그 전날 건물 곳곳을 답사한 터라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 다른 일로 건물에 들어가려던 전경 하나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예전에 와보셨나요?” 전경의 표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나 올 수 없었던 곳. 일반인 신분으로 이곳에 왔다면 결코 몸 편히 있다 나가진 못했다는 걸 그도 알 것이다. 내 익숙한 발걸음에 그는 이렇게 묻고 싶은 듯 했다. “예전에 이곳에 끌려와 보셨나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간다. 509호 조사실에 들어서니 박정기 아버님이 먼저 와 계셨다. 1987년 이 곳에서 고문을 받다 죽은 박종철 열사가 바로 그의 친아들이다. 박정기 아버님은 보자기에 곱게 싼 영정을 조사실 세면대 위에 올려놓고 꽃도 올려놓았다. 2001년 조사실에서 박종철 열사 14주년 위령제를 위해 처음 남영동 보안분실을 방문한 이후 첫 방문이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온 집안의 희망”이었다는 아들이 죽은 곳을 18년 동안 두 번밖에 방문하지 못했다. 참말로 삼천리 금수강산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나라다. 


사실 박정기 아버님과 6월에 인터뷰를 하려고 했다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아버님은 약속장소까지 나온 다음 나에게 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혔다. 추진위 활동도 전적으로 동의하고 인터뷰 의도도 고맙게 생각하지만 당신이 전면에 너무 나서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면서. 기자를 만나러 간다면 가족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말도 하지 않고 나왔다며 그는 이런 말을 했다. “고문을 당한 사람에게는 ‘고’자 얘기도 꺼내지 않는겁니다. 그게 바로 그 사람의 인권을 지켜주는 겁니다.” 


조사실에서 자리를 옮겨 7층 회의실에서 박정기 아버님과 인터뷰를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고’자 얘기를 꺼내야 했다. 아버님은 한숨을 깊게 내쉰 다음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독재정권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날의 아픔을 어찌 꿈에라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꽃다운 젊은이였던 내 아들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는 아픔이 나에게 왔습니다. 세상의 끈이 끊기고 홀로 남겨진 심정을 어디에 비하겠습니까. 질긴 것이 사람 목숨이라 죽지 못해 사는 게 원통할 뿐이지요.”


유럽은 20세기 초 터키가 벌인 아르메니아 학살을 금방 잊어버렸고 그 결과는 나치가 벌인 인종말살 정책으로 이어졌다. 4.3항쟁 당시 학살을 비롯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 잊혀진 결과는 5월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이었다. 남영동 보안분실에서 수없이 많은 이들이 피눈물을 흘렸다. 새롭게 들어서는 인권기념관이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뜻을 기억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적어도 우리가 ‘기억’하는 한 똑같은 비극이 다시 벌어질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 테니까. 


2005년 8월 12일 인권실천시민연대(www.hrights.or.kr)에 기고한 글입니다.

2005년 8월 16일 오전 11시 37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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