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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시민의신문 기사

“미완의 복권…하지만 역사바로세우기 단초” (2005.2.28)

by betulo 2007.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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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복권…하지만 역사바로세우기 단초”
정부, ‘줄타기 결정’ 비판속 발굴 지속 관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서훈 의미와 과제
2005/2/28
강국진 globalngo@ngotimes.net
 

정부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서훈을 추서하기로 결정한 것은 해방60주년의 의미를 되살리고 과거사를 바로잡아 남북분단을 극복하자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럼에도 보수단체의 반발을 의식해 몽양 여운형 선생에 대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아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결정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정부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54명을 ‘복권’시킨 점에 높은 의미를 부여했다. 신용하 국가유공자 공적심사위원장(서울대 명예교수)은 “세계 흐름에 따라 사회주의 계열자에게도 포상이 이뤄졌다”며 “이는 긍정적이고 높이 평가해야 할 방향전환”이라고 강조했다.

 

              

               23일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에서 바라본 북한 기정동 마을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분단 60주

               년인 올해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으로 한반도 주변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지만 북녘의 산

               하는 평화로와 보인다. 양계탁 기자 gaetak@ngotimes.net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완전복권은 아니지만 복권의 단초를 열었다는 점에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첫단추가 될 것”이라고 이번 결정을 환영했다. “독립운동사에서 좌파․사회주의계열은 이들을 빼놓고는 얘기가 안될 정도로 중요한 비중을 갖습니다. 사실 독립운동가 서훈은 군사독재정권이 자신들의 정권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처음 시작했던 거지요. 냉전시대고 분단․반공이데올로기를 선전하려고 사회주의계열을 서훈에서 배제하다보니 독립운동의 실상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 돼버렸던 겁니다. 늦었지만 큰 의의를 갖는 결정입니다.”

 

한 교수는 그러면서도 “이번 결정은 전면적인 것이 아니다”며 “해방 후 이북으로 간 사람들이나 적극적인 사회주의 성향 인사들은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앞으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을 더 많이 발굴하고 복권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결정을 주도한 국가보훈처에서도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를 심사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물론 그 핵심에는 독립운동과 해방정국에서 핵심인물이었던 몽양 여운형이 있었다. 신 교수가 “모두 세차례에 걸쳐 투표를 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라며 “이렇게 힘든 심사과정은 처음”이라고 밝혀 심사위원들 내에서도 이견이 많았음을 숨기지 않았다. 신 교수는 “(일반적인) 애국지사들에 대해서는 심사위원들이 (훈격을) 후하게 드리려고 하는데 여운형 선생의 경우는 관심이 집중돼 있고 포상자체를 반대하는 여론도 많아 너그럽게 하지 못하고 규정에 따라 무기명 투표를 통해 결정했다”고 말했다.

 

결국 국가보훈처는 1급을 주장하는 의견을 개진한 적지 않은 심사위원들과 예상되는 보수단체의 반발 사이에서 ‘줄타기’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몽양 여운형선생 추모사업회는 “좌우이념과 대립의 갈등을 털어버리고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겠다는 취지에서 진행된 서훈작업이 또다시 자의적인 것이 된다면 몽양의 활동내용을 아는 국민과 훗날의 역사가들은 무엇이라 평하겠는가”라고 꼬집기도 했다.

 

죽은 여운형이 남북화해 기폭제 될 수도

 

여운형은 1946년 직접 평양을 여러번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하는 등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당시 여운형은 60세였고 김일성은 34세였다. 장유유서와 체면을 강조하는 당시 상황에서 결코 쉽지 않은 용기를 보여준 것이다.

 

여운형의 일곱 자녀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여원구씨는 현재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과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직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2002년 8․15민족통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아버지 묘소를 찾기도 했다. 국내에는 여운형의 동생 여명구씨 등 10여명의 유족이 있다.

 

보훈처는 상징성을 고려해 훈장을 여원구씨에게 전달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훈처 규정에 따르면 외국에 거주하는 유족이 정식으로 등록절차를 거치면 연금을 지급하도록 되어 있다. 여원구씨가 등록을 하면 매달 130만원 가량의 유족연금이 지급된다.

 

여원구씨가 대한민국 훈장을 받을 수 있을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여원구씨 측에서 대한민국 훈장을 수락한다면 경색돼 있는 남북대화에 돌파구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죽는 날까지 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여운형이 암살된지 58년만에 남북화해의 전령사가 될 수 있을지 북한측의 반응이 주목된다.

 

 제 86주년 3.1절 포상자 명단

건국훈장 대통령장 (1)

여운형

건국훈장 독립장 (2)

권오설, 조동호

건국훈장 애국장 (4)

강창보, 구연흠, 김재봉, 김진영

건국훈장 애족장 (28)

강관순, 강병창, 강종득, 강해석, 권대형, 권오돈, 권평근, 김남수, 김성오, 김순종, 김여석, 김유인, 도정호, 박봉석, 박종희, 박태홍, 배성룡, 배희두, 서재익, 이강목, 이국범, 이태로, 장순기, 전순협, 조옥현, 조점환, 한면필, 현준석

건국포장 (29)

강몽호, 강치구, 김상무, 김재중, 김종택, 김지태, 노도용, 박병두, 박상윤, 박용신, 박익희, 송호곤, 송호기, 신명준, 안창대, 유훈상, 육학림, 이형영, 임종만, 임종한, 장태형, 정진무, 정창남, 정해철, 조준기, 최봉기, 최영운, 하준기, 황수룡

대통령표창(101)

강익승, 강춘삼, 권성필, 권영갑, 권용군, 권중협, 권태호, 권한복, 길영희, 김경천, 김금산, 김금손, 김기배, 김기봉, 김덕연, 김동운, 김동준, 김백경, 김봉희, 김상억, 김순천, 김유봉, 김자봉, 김재준, 김정식, 김제석, 김주현, 김창윤, 남기원, 남진우, 문심연, 박영환, 박원종, 박의성, 박인용, 배덕수, 복기준, 서삼종, 성낙응, 손군호, 송근상, 신경화, 신봉순, 신태빈, 안상태, 양기환, 양두환, 양회준, 오기룡, 오대근, 유성진, 유일현, 유혜무, 윤상흥, 윤용욱, 이계성, 이기안, 이보성, 이상익, 이상철, 이상협, 이석화, 이성하, 이아수, 이용근, 이우용, 이은교, 이응길, 이재관, 이정수, 이지성, 이진규, 이진석, 이철순, 이현춘, 이흥주, 인길복, 임영구, 임태봉, 장선기, 정동구, 정동선, 정동식, 정동직, 정성모, 정정복, 조균, 조영호, 조원상, 조종원, 조준검, 조충성, 주명규, 최건수, 최규석, 최명용, 최봉준, 최원득, 한상인, 한준겸, 함성열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여운형은 누구?

‘공산당선언’ 최초번역한 한국인

 

독립운동과 해방정국에서 차지하는 여운형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그는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히로히토 일본천황 등 당대의 인물들을 만나 조선해방문제를 역설했으며 1928년경에는 홀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소련 등을 여행하기도 하는 등 보기 드물게 국제적 감각을 갖추었다. 1920년 고려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이 당시 <공산당선언>을 번역했다. 청년시절에는 개신교 교회에 다니기도 했으며 언론사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조선대표로 보냈으며 1920년에는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당시 여운형은 번역부 위원을 맡았으며 <공산당선언>, <공산주의ABC> 등 사회주의 서적들을 번역해 국내와 만주, 시베리아에 배포하는 일을 하였다. 정병준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는 “여운형은 <공산당선언>을 최초로 번역한 한국인”이었다고 말했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여운형은 1944년 지하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고 해방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독립국가 건설에 매진하는 등 일제시대부터 해방직후까지 한국독립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정 교수는 “해방 후 여운형은 양 극단으로부터 논란과 비난의 표적이 되었고 역사상 가장 많은 테러의 표적이 된 채 생을 마감했다”며 “그가 잠시 맛본 해방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의 와중에서 그의 운명은 암살로 예정돼 있었다”고 밝혔다.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2005년 2월 28일 오전 3시 4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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