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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령은 죽여야 한다

雜說

by betulo 2024. 12. 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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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학교에서 상대성이론을 배울 때 선생님은 이런 비유를 들었다. “즐거울 때는 시간이 후딱 지나가고, 괴로울 때는 시간이 겁나게 늦게 간다.” 글쎄 그게 정말 상대성이론을 설명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는 지금 무척이나 괴롭고 고통스런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아직도 그 분 임기가 절반밖에 안 지나갔다. 다음 대통령 선거까진 3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진짜 욕 나온다.

2022년 3월 대통령선거 직후 블로그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착한척하고 무능력한 정부에 너무나도 실망한 끝에 안착하고 능력 있는 체하는 차기 정부를 선택했다.” 지금도 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한 가지는 수정해야겠다. 위선을 너무나 싫어한 나머지 능력 있는 척 하지도 않는다. 능력 없는 게 뭐가 문제냐고 당당하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압수수색 뿐이다. 국정목표는 ‘이재명 감옥 보내주기’가 전부다. 물론 그마저도 제대로 못한다.

주변에 대통령에게 실망했다는 얘길 하는 분들이 가끔 있다. 이렇게 일을 못할 줄 몰랐다느니, 이 정도일 줄 몰랐다느니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 정부에 전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해주곤 한다. 애초에 기대가 없었으니 실망할 것도 없다. 어쨌든 덕분에 검찰이 능력 있는 집단이라는 환상은 확실하게 박살 났다. 김영삼이 통일 기반 마련을 위해 남북한 경제력 격차를 확실하게 줄여놓은 것 못지않은 업적으로 역사에 길이 남지 않을까 싶다.

군대에서 제대한 게 1998년이었다. ‘부산 앞바다에 손가락이 둥둥 떠다닌다’는 썰렁한 농담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외환위기 충격이 너무 고통스러워 김영삼 찍었던 자기 손가락을 잘라서 바다에 버렸다나 뭐라나. 그 뒤로도 대통령 선거를 여러 번 했는데 우리 국민들 손가락이 남아날까 걱정이 살짝 되는 게 사실이다. 공중목욕탕에서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칠냉팔온은 건강에 좋기라도 하지, 왜 우리는 5년마다 열광과 절망을 되풀이해야 하는 것일까.

대통령선거, 정도령 찾기 게임

이쯤에서 우리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기던 상식을 다시 살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문제는 대통령을 잘못 뽑은 게 아니다. 애꿎은 손가락 탓할 게 아니다. 대통령 선거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닐까.

현재 한국이 시행하는 5년 단임 대통령제는 비유하자면, 정도령 찾기 게임이다. 대한민국은 5년 내내 <정감록>에서 예언했던 바로 그 ‘정도령’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5년에 한 번씩 ‘이 분이 그 분이다’ 하며 정도령을 추대한다. 수백만 수천만 신도들이 구름처럼 정도령 주위에 몰려들어 열광한다. 정도령이 대통령이 되면 국격도 올라가고, 도로도 깔아주고 지역에 예산도 내려주실 거라 기대한다.

그렇게 5년마다 한 판 큰 굿이 벌어진다. 정도령은 임금님이 되기도 하고 ‘아름다운 패배’를 하기도 하는데, 물론 전혀 중요하지 않다. 5년 뒤 재림할 새로운 정도령을 기다리는 게 중요하다. 구중궁궐에 숨어있는 임금님을 잘근잘근 씹어주는 건 정도령을 맞기 위한 준비운동 되시겠다.

정도령에게 중요한 자질은 뭐니 뭐니 해도 기득권 정치권을 저주하며 국민들 막힌 속을 뚫어주는 사이다 발언이다. 그냥 열심히 떠들어주고, 가끔 신도들 앞에서 어퍼컷이라도 날려주면 그걸로 족하다. 정도령을 찾아 헤매는 중생들에게 중요한 건 정치를 바꾸고 나라를 개혁하는 게 아니라 그저 현실 정치를 욕하며, ‘나는 너희 같은 더러운 족속이 아니야’는 믿음에 부합하는 증거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승리한 정도령은 더 이상 정도령이 아니다. 타파해야 할 기득권 정치인일 뿐이다. 어쩌면 정도령이란 프레이저가 쓴 신화연구의 고전 ‘황금가지’에 등장하는, 황금가지를 지키며 존경과 칭송을 누리지만 결국은 살해당할 운명인 신관(神官)일지도 모르겠다. 신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신관을 죽인 사람을 새 신관으로 영접한다. 신도들에겐 그냥 신관이 있다는 게 중요할 뿐 누가 신관인지는 관심 밖이니까. ‘로미오는 죽어야만 한다.’

새로운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는 그렇게 수많은 정도령을 5년짜리 임금님으로 세우고, 5년 동안 우리가 뽑은 정도령을 욕하며 다음 정도령을 기다렸다. 그렇게 우리는 1987년 이후 열광과 절망, 열정과 냉소를 되풀이하며 5년 주기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롤러코스터마저 제대로 작동을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내 질문은 이런 것이다. 오천만의 열망을 단 한 사람에게 투영하는 방식, 오천만의 꿈과 희망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건 승률이 너무 낮은 도박 아닐까? 정도령을 제대로 찾는 건 해답이 아니다. 소녀들에게 백마 탄 왕자님이 필요 없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도령이 아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정도령을 죽여버리고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상상력 아닐까.

 

#2024년 12월3일 밤에 쓴 인권연대 기고문입니다. 이 글 완성하고 나서 10분도 안되어 윤석열이 계엄령선포...

발화점: 2022년 대선 직후 썼던 블로그 글여러 글을 대폭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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