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여러대가 체육관 앞에 도착하자 조용하던 체육관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전북 남원시 춘향골체육관에 마련된 백신접종센터는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75세 이상 고령층에게 코로나19 화이자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지난 1일부터 시작했으니 전국에서도 가장 먼저 화이자 백신을 접종한 곳 가운데 하나다.
백신접종센터에서 만난 박은순 남원시 건강생활과장은 “의료진 한 명이 대략 150명을 접종한다. 어제까진 하루 600명 가량 접종했는데 오늘부턴 정부 방침에 따라 800여명을 접종할 계획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비롯한 방역 수칙을 고려하면 가용인력을 총동원하는 거라고 보면 된다”면서 “남원시 75세 이상 접종 대상자가 1만 5612명인데 현재 절반 가량 진행했다”라고 설명했다.
지팡이를 짚거나 휠체어를 탄 접종 대상자들을 도와서 안내하고 접종신청서 작성을 도와주느라 백신접종센터는 아침 일찍부터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남원 백신접종센터에 이어 찾아간 전북 정읍시 백신접종센터 역시 다르지 않았다. 남원과 마찬가지로 지난 1일부터 문 연 정읍 백신접종센터에서 만난 김영덕 총무팀장은 “정읍은 도농복합도시다. 시내에 거주하는 인구보다 농촌인구가 훨씬 많다보니 수송체계 마련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65세 이상 인구가 3만명으로 고령화율이 30%나 된다. 75세 이상 백신 접종 대상자도 1만 2338명이다. 시청부터 주민센터까지 정읍시 행정역량을 총동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정읍시와 남원시가 지난 1일부터 예방접종을 할 수 있었던 건 연초부터 신속하게 초저온 냉동고를 신청하고 예방접종센터를 마련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보건소 뿐 아니라 시청과 주민센터 직원들 역시 백신 접종 대상자에게 일일이 연락해 백신 접종을 권유하고 동의를 받는 등 관련 서류작업을 거들고 있다. 인근 군부대에서 파견나온 군인들이 냉동고 감시를 하는 등 말그대로 민관군이 모두 나선 총력전이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아이디어와 실험으로 행정안전부에서도 인정하는 백신 접종 우수 지자체로 꼽히고 있다. 다른 지자체에서 견학을 오거나 “비법을 전수해달라”는 문의전화도 자주 받는다. 일처리가 늦어진 곳에선 28일이 되어서야 75세 이상 백신 접종을 시작할 정도로 지역간 차이도 나타난다.
김 팀장은 “백신접종센터에서 사람 이동이 자연스럽게 하도록 하는데 신경을 썼다. 입구와 출구를 별도로 구성하고 은행에서 쓰는 번호표 기계도 들여놨다”면서 “코로나19로 어려움에 빠진 관광버스업계와 협력해 백신 접종 대상자들을 모셔오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관광버스연합회에서 어려운 시기에 큰 도움을 줘서 고맙다며 십시일반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기부를 해주는데 오히려 우리가 더 고마웠다”고 귀띔했다.
●“가장 급한 건 행정지원인력”
백신 접종이 속도를 더해 가면서 보완해야 할 사안들도 계속 생기고 있다. 백신접종센터 설치나 350만명에 이르는 75세 이상에게 백신을 접종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도전일 수밖에 없다. 전국 곳곳에서 예측하지 못한 일이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 백신 보관용 냉장고가 고장이 나거나 온도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아 백신을 폐기해야 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고, 접종 전 본인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는 바람에 85세 치매 노인이 두 번 접종받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런 속에서도 화이자 백신 접종은 속도를 더해 가고 있다. 4월 말까지 전국에 267개까지 백신접종센터를 늘리고 있고 접종 속도도 더해가면서 하루 14~15만명 접종이 이뤄지고 있다.
현장에선 새롭게 나타나는 과제를 확인하면 중앙정부에 건의하고, 중앙정부가 보완방안을 내놓으면 즉각 전국에 영향을 미친다. 백신접종센터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접종 대상자들을 백신접종센터로 옮겨주는 발 구실을 하는 버스기사들도 긴급히 백신 접종을 해야할지 등등이 좋은 사례가 된다.
박 과장은 “가장 급한건 의료진보다는 오히려 행정지원인력”이라면서 “고령층을 안내하고 신청서 쓰는 걸 도와주는 등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 정부에 예산지원을 요청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백신접종센터를 처음 열 때는 행정지원인력 10명으로 시작했는데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지금은 20명까지 늘렸다”고 설명했다. 실제 백신접종센터는 접종하러 온 고령층 한 명 한 명을 일일이 챙겨야 할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와 관련, 행안부 관계자 역시 “백신접종센터를 비롯해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임시직 확대 등으로 지자체에서 추가예산이 많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면서 “중앙정부 차원에서 교부세와 예비비 등 다양한 방안을 준비중”이라고 말했다.
김 팀장은 “백신 접종 대상자들을 위한 이동서비스를 하는 버스기사들은 백신접종 대상자에 포함이 안된다”고 지적했다. 중대본 영상회의 시스템이 여기서 힘을 발휘한다. 김 팀장은 “고령층이 고위험자라고 해서 먼저 접종을 하는데 이들을 한꺼번에 모시는 버스기사 역시 접종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점을 중대본에 건의하려 한다”면서 “매일 아침 중대본 영상회의를 통해 전국 지자체 관계자들이 상황을 공유하고 건의사항도 내놓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행안부에서도 주기적으로 김희겸 재난안전관리본부장 주재로 지자체 관계자들과 영상점검회의를 열고 어려운 점이나 건의사항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신속한 백신 접종 와중에 의외로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지자체와 중앙정부 공무원들의 ‘안면’이다. 공무원들끼리 서로 서로 학연·지연으로 얽혀있는건 부정부패를 비롯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게 사실이다. 하지만 백신 접종 속도전같은 상황에선 기관을 넘나드는 ‘연결망’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행안부는 지난 1월 코로나19 예방접종 지원단을 발족하고 국장급 17명을 지역전담책임관으로 지정했다. 행안부 국장급들은 지자체 근무 경험이 많기 때문에 지자체 관계자들과 신속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위탁의료기관에 냉장고 디지털온도계를 지원해달라는 건의를 받은 적이 있다”면서 “질병관리청과 협의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와서 국고보조금으로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공공의료·공중보건 중요성 절감”
대규모 감염병 위기에 대응하는 행정역량이 갈수록 커진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박 과장은 “400병상 공공병원인 남원의료원이 있다는게 코로나19 대응과 백신접종에 엄청난 힘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지방의료원이 있는 지자체와 없는 지자체는 확실히 차이가 난다”면서 “남원과 이웃한 주변 지자체에서 ‘우리도 지방의료원 있으면 좋겠다’며 부러워한다”고 귀띔했다. 이어 “몇 년 전만 해도 남원시 보건소 직원 가운데 간호직이 10% 정도에 불과했다. 간호직을 적극적으로 늘린 덕분에 지금은 60% 정도다. 간호직이 많은 것 역시 전문성 측면에서 큰 힘이 된다”면서 “코로나19가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공공의료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허성욱 정읍시 보건소장은 “몇 년 전만해도 보건소는 하는일 없이 노는 곳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공무원 중에서도 있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공공의료, 공중보건에 대한 생각 자체가 달라졌다”면서 “부서간 협조체계는 물론이고 기초지자체와 광역지자체, 지자체와 중앙정부간 협업체계가 갈수록 긴밀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처럼 조금만 더 고생하면 곧 마음 편하게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고 강조했다.
2021-04-29 16면
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10429016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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