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으면 배부르다. 뻔하고 당연한 얘길 대단한 발견이나 되는 양 강조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건 피곤한 노릇이다. 집권여당 지도부에서 요즘 많이 하는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딱 그렇다. ‘증세 없는 복지’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증세 없는 복지’는 ‘세금을 더 낼래, 복지를 포기할래’라며 국민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담론이다. 한국사회 담론지형이 얼마나 왜곡돼 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하나 마나 한 얘기가 신문 정치면을 장식하게 된 책임은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하다’고 했던 현직 대통령 박근혜에게 있다. 이건 마치 밥 굶으면 배부르다는 말이나 다를 바 없다. 박근혜는 2012년 선거 당시만 해도 민주당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복지공약을 내놓았다. ‘모든 노인에게 소득과 상관없이’ 지급하겠다고 공약했던 기초연금은 사실 진보신당 의원 조승수가 대표 발의한 기초노령연금법 개정안보다도 ‘과격’했을 정도다. 문제는 재원이었다.
두툼한 새누리당 대선공약집 어디에도 재원마련에 대한 구체적인 얘긴 없었다. 박근혜는 줄기차게 지하경제 양성화, 비과세감면 축소, 세출 구조조정만 거론했을 뿐이다. 사실 ‘증세 없는 복지’는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부터 논쟁 대상이었지만 박근혜는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하다”며 호언장담을 했다. 증세라는 부담스런 정책도 피해가고 복지공약으로 중간층 표심까지 얻는 전술은 선거에선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국정책임자가 되자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박근혜 정부는 지하경제 양성화에선 활로를 못 찾고, 비과세감면은 지지부진하며, 세출 구조조정은 표류하고 있다. 절박한 개혁 과제인데도 불구하고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과제가 조세재정제도라는 큰 틀 속에서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국무회의나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강조하며 “이렇게 이렇게 하세요”라고 지시만 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가장 적나라한 ‘선언과 현실’의 괴리를 비과세감면, 더 정확하게는 조세지출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세지출이란 ‘조세의 일반적 과세체계에서 벗어난 조세특례에 의하여 (특정한) 납세자에 대한 재정지원을 목적으로 발생하는 국가 세입의 감소’라고 정의할 수 있다. 조세감면, 비과세, 소득공제, 세액공제, 우대세율적용 또는 과세이연 등으로 구분한다.
최근 큰 논란이 되는 연말정산이 바로 비과세감면을 통한 사실상 부자증세 효과를 위한 정책이다. 이를 두고 벌어지는 민심이반과 ‘세금폭탄’ 논란은 비과세감면이 얼마나 예민하고 복잡한 문제인지 잘 보여준다. 외과 수술하듯이 단번에 환부만 도려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두 전체적인 조세재정제도라는 큰 틀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용창출투자세액공제 같은 사실상 대기업 특혜를 종료시키는 것은 좋은 정책 방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정부의 지지기반을 건드려야 한다. 박근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과세감면을 강조하지만 사실 현 정권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정책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에서 비과세감면 정비율은 2014년에는 전년 대비 1.1% 줄었을 뿐이고, 2015년에는 전년 대비 0.2% 줄 뿐이다. 국세감면액은 2014년(잠정치) 32조 9,810억 원이었고 2015년에는 33조 548억 원으로 되레 늘어날 전망이다. 정부는 2013년 조세지출 19개 항목을 폐지했고 2014년에는 7개를 폐지했다. 하지만 2013년에는 10개, 2014년에는 6개가 새로 생겼다. 올해 신설은 17개나 된다. 장담하는데, 선거가 있는 내년에는 더 많이 생길 것이고 조세특혜는 더 늘어날 것이다.
지방세 비과세감면은 그나마 상황이 좀 낫지만, 박근혜가 2013년 1월 인수위원회에서 했던 발언에 비춰보면 부끄러워지는 성적표다. “비과세감면 정비는 일몰이 되면 무조건 원책대로 해야 한다.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되고 하는 걸로 싸울 필요가 없다.” 2014년 일몰 종료되는 약 3조원 가운데 실제 종료시킨 것은 9,000억 원 가량이다. 애초 입법 예고했던 것에서 깎이고 깎인 결과였다.
지하경제 양성화도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사람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신용카드 활성화와 현금영수증 제도의 의의를 과소평가하지만 두 제도는 ‘세원 투명성’ 강화를 통한 증세 효과뿐 아니라 지하경제 양성화 효과도 적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제 와서 뭔가 간편하고 곧바로 세수증대 효과를 낼 수 있는 지하경제 양성화 방안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세출 구조조정은 더 어렵다. 정부가 4대강 사업을 포기할 수 있을까? 각종 도로건설 예산을 포기할 수 있을까. 당장 국회와 지자체, 재계에서 난리가 날 것이다. 한국 재정제도는 기본적으로 점증주의다. “예산항목을 원점 재검토하겠다”는 는 선언은 정치적 수사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정책에선 원점재검토 대상일 뿐이다. 더구나 박근혜 정부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조차도 선택과 집중 지점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다. 전략이 없으면 구조조정도 없다.
박근혜 정부에서 증세 거부는 이미 정책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이 돼 버린 듯하다.
더 큰 문제는 복지와 무관하게 증세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지난 2월 11일 자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세수결손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2012년 2.8조 원, 2013년 8.5조 원에 이어 2014년에는 11.1조 원으로 3년 연속 예산 대비 세수가 부족했다. 정부부채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경기침체도 원인이 아닌 건 아니지만, 좀 더 본질적인 원인은 먼저 이명박 정부가 강행한 소득세, 법인세 감세와 종부세 축소, 비과세감면 확대에서 찾아야 한다. 거기다 이명박 정부 이후 정부가 경제성장률 예측치를 과장하는 것이 세수결손 규모를 키운다. 지난해 집행을 하지 않아 사용하지 않은 예산 규모가 18조 원이었던 것에서 보듯 이제는 기재부가 예산집행을 줄이는 지경까지 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근 ‘증세 없는 복지’를 두고 논란이 거세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노릇이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에서도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는 데 별 이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증세 없는 복지’ 논쟁은 허깨비에 불과하다. ‘복지 없는 증세’는 두 가지 측면에서 논쟁의 핵심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먼저, 정부가 복지확대를 한 것인 양 눈속임을 한다는 점이다.
세대 간 불평등을 전제로 한 기초연금, 2012년에 여야합의로 확대한 무상보육 말고 정부가 무슨 대단한 복지확대를 했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게다가 해마다 늘어나는 복지예산은 사실 거의 공적연금과 공공부조 때문이다. 여당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복지를 축소한다는 것 역시 쉬운 문제가 아니다. 무상보육 후퇴는 여당에서도 부담스러워하고, 무상급식은 지자체와 지방교육청 예산으로 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다른 하나는 정부가 연말정산 논란과 담뱃값 인상에서 보듯 이미 증세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최근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 가운데 80%가 ‘현 정부는 증세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개인적으로 연말정산제도 개편은 조세 형평성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고, 담뱃값은 더 많이 인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국민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상관없이, 우리에겐 더 많은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국가가 필요하다. 국가가 일을 더 잘하고 많이 하려면 세금이 필요하다. 이렇게 얘기하면 대번에 반론이 거셀 것이다. “이 나라가 내게 해준 게 뭐냐”는 것부터 “부자와 대기업부터 세금 더 내라고 해라. 왜 서민 주머니 터느냐”는 비판까지 귀를 울린다.
국민이 납세 의무를 지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것들을 국가에 요구하기 위해서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인권증진(헌법 제10조), 고용 증진과 적정임금 보장(헌법 제32조 제1항), 사회복지와 재해예방·재난안전(헌법 제34조), 환경보전과 쾌적한 주거 보장(헌법 제35조), 소득분배 유지와 경제민주화(헌법 제119조 제2항) 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받는다.
복지확대는 국민들한테 상당한 지지를 받는 정책이 분명하지만, 재원마련을 위한 증세까지 고려하면 얘기가 매우 복잡해지는 게 사실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정부가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폐지한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과세 대상자가 3만 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서민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전혀 없었는데도 폐지 찬성 여론이 60%가량 나왔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리얼미터가 2011년 1월 25일 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면 무상복지에 찬성한다는 응답자는 50.3%로 절반을 넘은 반면, ‘증세를 하더라도 무상복지를 추진해야 한다’는 응답은 31.3%에 불과했다. 무상복지 반대가 34.5%였고 ‘세금을 늘리면서까지 무상복지를 할 필요는 없다’는 응답이 51.6%였던 것과 대칭되는 여론지형인 셈이다.
물론 반대 사례도 있다. 한국복지패널 부가조사를 보면 ‘사회복지 확대를 위해서는 세금을 더 거둬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는 응답이 2007년에는 37.9%였지만 2010년에는 52.5%, 2013년에는 54.7%로 증가했다는 점,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여야 가릴 것 없이 복지공약 경쟁이 벌어졌다는 걸 생각해보면 사회적 선호가 바뀌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응답자 가운데 41%가 ‘세금 더 내더라도 복지 수준 높여야 한다’고 답했다(여기를 참조).
이런 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국민들이 분노하는 건 조세 형평성이 높은 것도 아니고, 재정지출이 양극화 완화나 행복한 혹은 안전한 삶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는 불신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복지 없는 증세’라는 허깨비가 아니라 ‘복지 있는 증세’라면 어떨까. 최근 나타나는 양상은 복지가 있다면 증세를 감수하겠다는 국민 여론을 좀 더 조직하고 결속시킨다면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걸 하라고 ‘정치’가 존재한다.
조세는 국가가 국가로서 주권을 유지하기 위한 국방·치안뿐 아니라 사람으로서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적 인권인 시민적·정치적 권리(자유권)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사회권)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다. 헌법에 명시된 다양한 공적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재정능력을 확보해야 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조세 규모를 요구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국가는 모든 구성원에게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납세의 의무를 진다(헌법 제38조)”고 요구한다.
결국, 사태의 핵심은 ‘복지 없는 증세’에 있다. 감히, ‘복지 있는 증세’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글은 인권연대 기고문과 서울신문 2월 13일 자 칼럼을 대폭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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