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차량과 인력거로 꽉 막힌 방글라데시 다카 시내 도로 한 켠에서 쭈그리고 앉은 그 여인의 뒷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눈에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초 뒤, 순식간에 어색한 침묵과 당황스러움이 차 안을 채웠다. 방글라데시는 한반도 3분의 2 되는 국토에 약 1억 6000만명이 산다. 그 많은 인구 가운데 70%는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한다. 가난은 화장실 시설조차 사치스럽게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방글라데시 소방방재청 관계자들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했던 윤명오(서울시립대 교수)가 1970년도 사이클론으로 인한 사망자 규모를 언급하면서 발표자료에 30만명으로 써 있는 걸 가리키며 “이 숫자 맞는건가요?”라고 확인차 물어봤을 정도로 방글라데시에서 재난이란 비현실적인 수치를 동반한다. 싱가포르같은 도시국가를 빼면 단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구밀도는 재해 피해를 높이는 요인이 된다.
방글라데시 재난 통계에선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인적재난 빈도 1위가 화재인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2위는 건물붕괴다. 지난해 1127명이나 되는 사망자를 낸 ‘라나 플라자’ 붕괴사고가 특이한 사례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다. 만성적인 부정부패와 양극화는 실효성 있는 규제를 무력화시킨다. 한 소방관은 화재가 났던 건물을 안내하면서 “소방 관련 제도는 잘 갖춰져 있다. 문제는 기업에서 규제를 무시해버린다는 것”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8층이나 되는 건물이 무너지는 데 3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1127명이 죽었고 2458명이 다쳤다. 2013년 4월 24일 수도 다카 북동쪽 봉제공장이 입주해 있던 ‘라나플라자’가 붕괴된 사고는 세계 2위 의류 수출국인 방글라데시의 위상에 큰 타격을 입혔다. 방글라데시에서 의류산업은 전체 수출 가운데 79%를 차지한다. 직접 고용 규모만 400만명가량이나 된다.
방글라데시 시내를 다니다보면 듣도 보도 못한 명품차량이 넘쳐난다. 하나같이 앞뒤로 범퍼를 단 명품차가 차선과 신호등을 무시한 채 인력거와 속도 경쟁을 벌인다.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는 인력거를 마주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이 나라 보험사에선 대인사고는 취급하지 않는다. 저소득층이 몰려 있는 곳에서는 길이 좁아서 소방차가 진입하기도 힘든 반면 부자들로 붐비는 21층짜리 쇼핑몰에선 소방관 출신 직원 35명을 직접 고용해 사고에 대비한다.
방글라데시 여성들이 처한 현실은 극과 극을 오간다. 셰이크 하시나 총리가 2009년부터 정부를 이끌고 있다. 독립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장녀였다. 야당 대표 역시 여성이다. 사망한 전직 대통령의 부인이다. 하지만 대다수 방글라데시 여성들은 불평등과 차별에 시달린다. 중등교육 참여율은 31%에 불과하다. 높은 조혼률과 일부다처제, 등하교길에서 맞딱뜨리는 폭력 위험이 주요 원인이다. 매년 임신과 출산 관련 질병으로 1만 2000여명이 사망한다.
방글라데시 정부 역시 방글라데시가 처한 상황을 인지한다. 제6차 5개년 개발계획(2011~2015)은 부패근절과 인구증가 억제, 전기와 연료공급 확대, 인적자원개발 등 12개 주요 목표를 설정했다. 이를 위해 선진국에게 적극적으로 원조를 요청하고 있다. 안전행정부와 한국국제협력단, 서울시 등이 협력사업을 추진중인 소방방재 역량강화 컨설팅도 그런 배경 속에서 등장했다.
라나플라자 붕괴사고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방글라데시 소방방재청이 재난안전시스템 구축에 나서면서 도움을 받기 위해 찾은 곳은 서울시 종합방재센터였다. 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종합방재상황실을 둘러본 방글라데시 방재청 관계자들은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다카 사무소를 통해 한국 정부에 소방방재시스템 구축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외교부와 코이카, 안전행정부, 서울시 등 평소 왕래가 없던 정부기관 관계자들이 방글라데시 소방방재 역량 강화를 목표로 공공행정컨설팅을 하기 위해 손을 맞잡았다.
개발도상국을 돕기 위한 공적개발원조에서 가장 고질적인 지적 사항은 ‘부처 간 연계가 미흡하다’는 칸막이 문제다. 정부기관이 제각각 사업을 벌이다 보니 중복 투자와 사각지대가 동시에 발생하고, 예산 낭비 논란까지 나오게 된다. 중장기 종합 계획 속에서 부처 간 협력을 해야 하지만 실제 집행 과정에서는 말처럼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방글라데시 소방방재 역량 강화 사업은 매우 특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안행부와 서울시, 서울시립대는 그동안 지난 8월 1차 조사를 바탕으로 실행 계획을 마련했다. 추가 자료나 방글라데시 정부 동향을 비롯한 현지 실정은 코이카 다카 사무소에서 적극적으로 조언해 줬다. 핵심적인 내용은 정보기술(IT)을 활용한 정보 분석 시스템, 소방관 훈련 시스템, 행정 처리와 지원 시스템 등이다. 종합상황실 설치를 위한 방안도 포함됐다.
반응은 말 그대로 최고였다. 알리 아흐메드 칸 방재청장은 윤 교수가 20분에 걸쳐 발표한 프레젠테이션을 들은 뒤 “방글라데시 현지 상황을 최대한 반영한, 최적화된 대안으로 높이 평가한다”면서 “정말 인상적이다. 우리는 상호 협조 관계를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즉석에서 “오늘 저녁은 내가 사겠다”며 한국 방문단을 시내 고급 식당에 초청하기도 했다.
빈곤국가인 것도 사실이고 어느 곳부터 개선해야 할지 막막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인 것도 분명하지만 방글라데시 소방방재청 공무원들이 보여준 의지와 열정만큼은 이 나라에서 느끼는 ‘희망의 근거’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라나 플라자 붕괴사고를 계기로 소방방재 시스템 구축을 국가적 사업으로 선정한 뒤 아툴 하크시 내무부 과장을 총책임자로 임명해 소방방재청에 파견했다.
알리 아흐메드 칸 청장과 하크시 과장은 한국 관계자들과 회의에서 옆에서 수시로 토론을 하며 의논하는 모습을 보였다. 양석우 서울시립대 도시방재안전연구소 연구원은 “국가전략사업에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책임자에게 사실상 전권을 부여하고 힘을 실어주는 모습은 우리도 배울만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이병철 안행부 과장 인터뷰
스스로 “무던한 성격”이라고 하는 이병철 과장에게도 방글라데시는 첫인상이 썩 좋질 못했다. 이번 방글라데시 방문이 8월에 이어 두번째인 그는 당시 느낌을 설명하면서 “심란했다”는 표현을 되풀이했다. “빈곤국인건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정부 행정시스템이 있기는 한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죠. 도로에는 차와 인력거와 사람이 뒤엉켜 있고, 신호등과 차선조차 없는 곳이 많았습니다.”
방글라데시 정부 관계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첫인상은 기대와 희망으로 바뀌었다. 이 과장은 “이 나라가 대외원조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건 사실이지만, 자기 치부를 드러내는걸 누가 좋아하겠느냐”면서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자료를 요청하거나 궁금한 걸 물어보면 하루 이틀만에 상세한 답장이 오곤 했다”면서 “국민안전을 위한 시스템 구축을 고민하는 의지가 대단하다”고 밝혔다.
이 과장은 8월 방문을 통해 현지수요를 조사하고 자료를 모은 뒤 2개월 동안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방글라데시 소방방재청 회의실에 총집합한 알리 아흐메드 칸 청장 이하 간부들 20여명 앞에서 발표한 소방방재시스템 개편방안이 호평을 받았다. 이 과장은 “안행부 뿐 아니라 외교부, 코이카, 서울시, 학계가 힘을 합쳐 노력한 덕분 아니겠느냐”면서 “길게 보고 좋은 성과를 거두고 싶다”고 말했다.
이 과장은 지난 4월 신설부서인 행정한류담당관을 맡기 직전까지 국립재난안전연구원 연구기획과장으로 일했다. 행정분야 공적개발원조(ODA)와 소방안전시스템을 함께 고민하기에 적임자인 셈이다. 그는 “한국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해주는 나라가 된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공공행정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면서 “당장은 걸음마 단계이지만 한국식 공공외교에 한 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